시각 차이
남편과 나는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한국에서 퇴사를 했다.
'미국에서 맥도날드에서라도 일하면 되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순진했던 걸까.
남편은 한국에서 다니던 온라인 게임만큼의 지위와 수입을 원했다. 하지만 영어가 매끄럽지 못한 남편에게 한국에서 쌓은 경력은 생각만큼 쉽게 통하지 않았다. 1년을 ELS에 다니며 마음고생을 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나는 그때마다 말했다.
"1년 쉰다고 생각해."
그 말은 허공의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가장의 무게라는 걸 나는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걸까.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자기가 미국에서 나보다 가방끈이 기니까 일하는 게 어때?"
아이들 공부시키려고 나도 공부해서 칼리지를 졸업한 터였다. 하지만 퇴직 후 나도 1년 정도 쉬면서 무슨 일을 할지 생각하려고 했었다. 갑작스러운 남편 말에 조금 당황했다.
퇴직하기 직전까지 나는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했다. 20년을 몸담은 회사를 그만두고도 쉴 틈은 없었다. 미국으로 오기 전 두 달 동안 한국의 짐을 정리해야 했다.
이사비 견적은 천만 원이 넘었다. 먼저 미국에 가 있던 남편과 큰아이가 빌린 집이 좁아서, 아끼던 원목 식탁도 가져갈 수 없었다. 이사비를 줄이려면 짐도 줄여야 했다. 두 달 내내 당근마켓 알람을 붙들고 살았다. 몇 천 원짜리 물건 하나에도 추억이 묻어 있어서, 버리지 못하고 새 주인을 찾아주려고 애썼다.
정리를 하다 보니 결혼 전 남편이 보관하던 편지까지 들춰보게 되었다. 여자 친구가 보낸 것 같은 편지도 있었다.
'내가 지금 이것까지 해야 하나?'
내 편지들은 대부분 버렸지만, 남편의 편지 상자는 그대로 덮었다.
나는 늘 그런 식이었다. 당장 수입이 없는 남편의 돈 걱정을 먼저 생각했고, 쓸 수 있는 돈을 아끼려고 내 몸을 썼다. 문제는 내 몸이 그리 튼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업체에 이사를 맡기면 대충 포장하고 부피로 비용을 매길 게 뻔했다. 그래서 상자 하나, 물건 하나를 직접 포장했다. 조금이라도 부피를 줄이려고 애썼다. 상자 하나의 최대 허용 무게까지 꼼꼼하게 채웠다. 그래서 상자마다 무게가 20kg에 육박했다. 그걸 들어올려 차에 싣고 우체국까지 가져갔다. 원래도 좋지 않던 허리가 망가진 것 같았다.
'이러다 응급실 가는 거 아닌가.'
끊어지는 통증이 올 때는 덜컥 겁이 나 잠시 누웠다. 그리고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다시 일어났다.
그렇게 이사비 오백 만원을 아꼈다. 퇴직의 기쁨을 누릴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한겨울, 미국 미시간 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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