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의 생일이었다. 오늘이 특별하지 않아서 좋았다. 평소와 같이 출근해서 일을 하고 퇴근했다. 재성이가 꽃다발을 들고 마중나왔다. 독립문 쪽에 잠시 들렀다가 집에 왔다. 생일 선물로 욕조가 도착해있었다. 친구가 보내준 배민 상품권으로 기름진 참다랑어를 배달시켜먹었다. 후식은 재성이가 요리한 오겹살 수육. 고소한 수육이 오늘의 내 마음처럼 사르르 녹았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반신욕을 했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서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를 봤다.
소란함 없이 좋은 날 중에 조금 더 좋은 날로 오늘이 지나간다. 어느 시절엔 생일인 하루가 특별해야한다는 강박같은 게 있었다. 호캉스를 가거나 해외여행을 떠나고 비싼 물건을 샀다. 견딜 수 없는 삼백육십오일 중 단 하루라도 특별해야했다. 여의도 야경을 내려다보던 호텔보다, 헐렁한 티를 입고 엎드려 글을 쓸 수 있는 우리집이 좋다. 그저 하루하루가 제법 좋아서 오늘이 더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충만하게 살고 있구나. 특별하지 않아도 마음이 풍요롭구나. 뭉근한 풍요함이 가장 특별한 생일 선물이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어도 나의 하루만으로 충분하다. 그냥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엄마도 내 생일을 까먹었지만!
한편으로는 관계에 대한 피로가 만성적이라는 걸 깨닫는다. 생일 축하를 주고 받는 것도 버거웠다. 사람과 상호작용이 영 성가신 기분이다. 아무도 안만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에 시험 공부할 때 몇 달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낸 적이 있다. 무척 편했다. 동시에 그 몇 달간 난 무척 후진 사람이 되어있었다. 쉬지 못해서가 아니라 체력이 떨어져서 오는 피로가 있다. 그런 피로를 겪을 땐 오히려 운동을 해야한다. 내가 사람에 대해 느끼는 피로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피로하지만 필요한 어떤 것. 내가 얼마나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인간인지 알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여러 관계에 노출되어서 갈고 닦아야하는 부분들이 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람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지면 무척 별로인 인간이 된다. 이 풍요함 속에 내가 깨야하는 건 나로서, 혹은 나만이 충분하다는 풍요함일지도 모르겠다. 아이고 피곤해.
삶은 좋은 것, 그리고 피로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