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빌에 남겨둔 약속

첫번째 가족

by비주류여행자

2005년 첫 인도 여행에서는 북인도를 돌아다녔다. 이듬해인 2006년 12월 말, 두 번째 여행을 떠나면서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북인도와는 다른 인도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다 2007년 1월, 남인도 우띠(Ooty)의 차밭 언저리에서 한국인 가족을 만났다. 당시 인도는 한국인 배낭여행자들에게 제법 인기 있는 여행지였지만, 남인도까지 내려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들려온 한국어가 무척 반가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은 오로빌(Auroville)이라는 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인도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그곳에 한국인 가족이 정착해 살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폰디체리에 오면 꼭 연락 주세요.” 그들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수첩에 번호를 적어두고 여행을 이어갔다.


한 달쯤 뒤, 케랄라를 여행하고 인도의 땅끝마을 칸야쿠마리를 거쳐 라메스와람과 마두라이를 둘러본 뒤 폰디체리에 도착했다. 우띠에서 만난 가족이 떠올랐다. 전화를 걸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토릭샤를 타고 오로빌 베이커리 앞으로 오면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 오로빌이 어떤 곳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오토릭샤에 올랐다. 그저 한번 가보고 싶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다시 전화를 걸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바이를 탄 젊은 한국인 몇 명이 나타났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오로빌은 그동안 보아온 인도와 사뭇 달랐다. 울창한 숲 사이로 길이 나 있었고, 집과 공동체 시설들이 그 안에 흩어져 있었다. 서로 다른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국제 공동체라고 했다. 복잡한 도시와 북적이는 시장을 돌아다니다 온 내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그들은 나를 미트라(Mitra)라는 게스트하우스로 안내했다. 그런데 숙소에는 조건이 있었다. 35세 이하의 여행자가 이용할 수 있었고, 당시에는 최소 2주를 머물러야 했다.


2주라니. 그때의 나는 가능한 한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여행자였다. 한 도시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면 다음 목적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는 오로빌에서 2주를 지내야 한다니,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반면 가격은 마음에 들었다. 도미토리 침대 하나에 하루 150루피. 오로빌을 돌아다닐 때 필요한 모페드(Moped)도 하루 50루피 정도면 빌릴 수 있었다. 넉넉지 않은 경비로 여행하던 대학생에게 숙박비와 교통비는 중요한 문제였다. 게다가 이번 여행에서 가보고 싶었던 남인도의 주요 도시들은 이미 상당 부분 둘러본 뒤였다. 그렇게 고민 끝에 오로빌에서 2주를 머물기로 했다.


오로빌은 생각보다 넓었다. 걸어 다니기에는 거리가 만만치 않아 모페드를 빌렸다. 작은 엔진 소리를 내며 숲길을 달렸다. 처음에는 길도 사람도 낯설었지만, 며칠 동안 같은 길을 오가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미트라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젊은 여행자들이 머물렀다. 나는 그중에서도 티베트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낮에는 각자 돌아다니다가 저녁이면 숙소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만난 친구들 가운데는 지금도 연락하는 사람이 있고, 어느 순간 소식이 끊긴 사람도 있다. 오로빌에서는 특별한 일정을 세우지 않아도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아침에 모페드를 타고 나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왔다. 꼭 봐야 할 관광지도, 서둘러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처음에는 너무 길다고 생각했던 2주가 어느새 짧게 느껴졌다.


그 무렵 팔라비(Pallavi)를 만났다. 미트라에서 일하던 팔라비의 어머니는 갓 돌이 지난 딸을 매일 데리고 출근했다. 나는 평소 아기들을 좋아해 여행 중에도 어린아이들과 종종 놀아주곤 했다. 팔라비와도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아이도 나를 익숙하게 받아들였고, 어머니와도 가까워졌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오로빌을 떠나던 날, 미트라에서 만난 친구들, 팔라비와 그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때는 내가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2014년 말, 나는 세 번째 인도 여행을 떠났다. 앞선 두 번의 여행에서 북인도와 남인도의 주요 지역을 돌아보았기에, 이번에는 가보지 못했던 안다만 제도를 목적지로 정했다. 여행 경비를 아끼려고 비행기 대신 배를 타기로 했다. 비샤카파트남에서 포트블레어로 향하는 배편에 맞춰, 남인도를 거쳐 올라가는 일정을 짰다. 그 길에 폰디체리와 오로빌이 있었다. 그렇게 2015년 새해를 폰디체리에서 맞았다. 그리고 오래전의 기억을 따라 다시 오로빌로 향했다. 2007년 첫 방문 이후 8년 만이었다.


예전에 머물렀던 미트라는 아직 남아 있을까. 그때 만났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무엇보다 갓 돌이 지났던 팔라비가 얼마나 자랐을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들어선 숲길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었다. 예전에 모페드를 타고 수없이 오갔던 길인데, 막상 다시 오니 기억만으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 풍경도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스쿠터를 빌려 하루만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오로빌에 오니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비지터 센터에서 숙소를 알아본 끝에 가네샤 베이커리 근처의 도미토리를 구했다.


짐을 옮기고 다음 날 미트라를 찾아갔다.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건물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예전에 머물렀던 도미토리와 마당을 둘러보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샤였다. 팔라비의 어머니와 함께 미트라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나를 알아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행자가 이곳을 거쳐 갔을까. 8년 전 잠깐 머물렀던 나를 기억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샤는 이제 미트라를 인수해 직접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팔라비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녀는 팔라비의 아버지 바스카란(Baskaran)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곧장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일단 기다려보기로 하고 오로빌 비치로 향했다. 미트라에서 만난 친구들과 해수욕을 즐기던 곳이었다. 과일을 팔던 가게와 사람들로 북적이던 해변을 떠올렸지만 눈앞의 풍경은 그때의 풍경과 사뭇 달랐다. 그래서인지 같은 해변에 서 있는데도 다른 곳에 온 것 같았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없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해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바스카란이었다. 우리는 오로빌 타운홀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간에 맞춰 찾아가자 그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고, 곧장 집으로 안내했다. 팔라비의 어머니도 나를 알아보았다.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나눴다. 그리고 팔라비를 다시 만났다. 내 기억 속에서는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였는데, 눈앞의 아이는 훌쩍 자라 있었다. 팔라비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자꾸 팔라비 쪽으로 눈길이 갔다. 내가 오로빌을 떠난 뒤에도 이 아이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다음 날이 팔라비의 생일이었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넬 작은 선물을 챙기곤 했다. 이번에도 펜 여러 자루와 작은 무선 램프, 오래된 보이스 레코더를 가져왔다. 팔라비는 청각장애가 있어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보이스 레코더도 아이에게 쓸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준비해 간 물건들을 생일 선물로 건넸다. 8년 전 미트라에서 함께 놀던 아기의 생일을 다시 찾아와 축하하고 있었다. 짧은 생일 파티를 마치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바스카란이 말했다. “다음에 다시 오면 꼭 우리 집에 머물러요.” 나는 다음에 오로빌을 찾으면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2016년 3월, 네 번째 인도 여행에서 다시 오로빌을 찾았다. 이번에는 게스트하우스를 알아보지 않았다. 지난해 바스카란과 나누었던 약속대로 팔라비 가족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보름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밥을 먹었다. 낮에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면 같은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손님이라 조금 조심스러웠지만, 날이 지날수록 그 집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공교롭게도 그 기간에 내 생일이 있었다. 팔라비와 어머니는 나를 위해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주었다. 지난번에는 내가 팔라비의 생일을 축하했는데, 이번에는 그 가족이 내 생일을 챙겨주었다. 케이크 앞에 앉으니 우띠에서 만난 한국인 가족이 떠올랐다. “폰디체리에 오면 꼭 연락 주세요.” 그 말을 따라 처음 오로빌에 왔다. 최소 2주를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에 망설이다 미트라에 짐을 풀었고, 그곳에서 팔라비를 만났다. 다시 찾아왔을 때는 아이의 생일을 축하했고, 이제는 그 가족이 만든 케이크를 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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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비가 만들어준 생일 선물


처음 오로빌에 왔을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연락은 이어졌다. 팔라비에게 줄 색종이와 스티커를 사러 문구점에 가기도 했고, 작은 선물들을 모아 소포로 보내기도 했다. 2016년 말에 떠나 2017년까지 이어진 다섯 번째 인도 여행에서도 오로빌을 찾았다. 이번에는 열흘가량 팔라비 가족과 함께 지냈다. 바스카란을 따라 건물을 새로 짓는 현장에도 갔다. 그곳에서는 공사가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하는 푸자(Puja)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집을 짓거나 큰일을 시작하기 전에 고사를 지내는 것과 비슷한 의식이었다.


처음 오로빌에 왔을 때는 숲길과 공동체 시설들을 구경했다. 이제는 바스카란을 따라 공사 현장에 앉아 의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혼자 여행했다면 찾아올 일이 없었을 곳이었다. 가끔은 미트라에도 들렀다. 팔라비의 집에서 걸어서 몇 분이면 갈 수 있었지만, 예전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숲길을 달렸다. 미트라 마당의 작은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다. 그곳에서 보냈던 2주가 떠올랐다. 하루 150루피짜리 도미토리, 하루 50루피를 주고 빌린 모페드, 저녁마다 어울리던 티베트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미트라에 오던 어린 팔라비. 그때 나는 숙박비부터 계산했다. 저렴해서 마음에 들었지만, 2주나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망설였다. 결국 그곳에서 만난 아이의 집에, 몇 년 뒤 다시 찾아와 머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북인도가 궁금했고, 다음에는 남인도, 그다음에는 안다만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오로빌을 다시 찾을 때는 무엇을 볼지보다 팔라비 가족이 어떻게 지내는지가 먼저 궁금했다. 지난번에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며칠이나 머물 수 있을지 일정을 살폈다. 오로빌에는 기억하는 장면이 많다. 모페드를 타고 달리던 숲길도, 친구들과 어울리던 미트라의 저녁도 좋았다. 그중에서도 팔라비 가족이 만들어준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앉았던 날은 오래 남아 있다. 2007년 처음 오로빌에 왔을 때, 나는 2주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시 찾아가면 짐을 풀 집이 있고, 함께 밥을 먹으며 안부를 나눌 사람들이 있다. “다음에 다시 오면 꼭 우리 집에 머물러요.” 오로빌을 생각하면 지금도 바스카란의 그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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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과 2016년의 팔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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