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말은

오늘의 식물

by조이 영


오늘 복지관 주간보호센터 원예 수업은 포인세티아 만나기였다. 포인세티아는 12월을 알리는 식물로 크리스마스 꽃이라 불리기도 한다. 존재감을 과시하는 빨간색의 잎을 가져서 그럴 것이다. 어르신들에게 12월이 왔다는 시간 감각을 알려 드리려 준비했다.


포인세티아의 붉은 잎을 꽃이라 알고 있지만 꽃은 가운데 있는 작은 쌀톨만한 돌기 모양을 하고 있다. 눈에 띄지 않는 그곳에 수술과 암술이 있다. 꽃 주변에 있는 잎은 해가 가장 짧아지는 크리스마스 때쯤이 되었을 때 가장 붉어진다. 볼품없는 꽃을 위해 잎이 꽃잎처럼 색을 붉게 물들인다. 큰 꽃처럼 보여 지나가는 벌레나 나비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수술 암술이 수정을 하도록 하는 식물의 생존방식이 놀라울 따름이다.


수업이 시작되어 먼저 조화로 된 포인세티아를 어르신께 드렸다. 꽃 부분이 어디인지 만져보고 빨간색 잎이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밑에 있는 초록 잎과 같은 모양의 붉은 잎을 만져보기 위해서다. 한 분 한 분 잘 구분하는지 확인 후 흙에 심어진 포인세티아 화분을 드렸다. 흙냄새 풍기며 나타난 살아있는 빨간 포인세티아를 보며 모두 환호하였다. 마치 플라스틱 꽃이 생화로 변하는 마술을 보는 것처럼. 생화 화분에서 다시 꽃을 찾아보고 잎들의 색을 구분했다.


피부가 얇아 푸른 핏줄이 비치는 어르신 손에 들려 있는 붉은 포인세티아는 수혈을 하는 듯 그분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얼마 줘야 하냐고 묻는 분도 계시고 물 주기를 얼마나 해야 하냐고 걱정부터 하는 분도 계셨다. 때 마침 어르신 한 분이 노래를 시작하였다. 평상시 반응이 많지 않던 분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이 노래는 어린 시절 친구하고 뜻도 모른 채 고무줄놀이하며 불렀던 노래인데. 하필 왜 이 노래를. 꽃 장식 수업을 하다 보면 기분이 좋아져 노래를 흥얼거리시는 분이 계신다. 대체로 트롯으로 된 노래이거나 꽃 관련된 노래이다. 때로는 가곡을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소극적인 분이 군가를 갑자기 부르시는 것은 과거 회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느닷없는 낯선 노래 부르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급하게 뜬금없는 말을 해 보았기 때문이다. 큰아이 고등학교 1학년 때 학원을 데려다줄 때였다. 학원가 복잡한 거리에서 접촉사고도 당해보고 새치기하는 차들과 실랑이도 하면서 아이를 학원에 지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손에 힘을 주고 운전하던 시절이었다.

학원 앞 좌회전 차량이 너무 많아 답답해하던 아이는 늦을 거 같다고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고 했다. 급히 유턴해 차를 세우니 아이는 서둘러 내렸다. 갑자기 내리는 아이 뒷모습에 돌아올 차비는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이미 반쯤 내려 버린 아이에게 크게 소리쳤다. “아들, 토큰 있어?” 하고. 자동차 문을 닫으려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내 눈은 커졌다. 토큰이라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사십 년 넘는 세월을 훌쩍 건너간 단어를 아들은 이해나 할까. 나는 왜 이 단어가 나오는 거지. 당황해하고 있는데 아들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있어요, 엄마" 하면서 차 문을 닫고 급하게 뛰어갔다.


현실은 휘발되고 의미로 남아 있는 말. 오늘 수업 중에 들은 노래는 내가 외친 토큰 같은 말이 아니었을까. 군가이지만 가슴속 어디에 수십 년 숨어 있던 어르신의 그 시절을 표현해 주는 말들. 그것은 붉은빛을 내며 살아있는 꽃을 손에 쥔 순간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옛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토큰이라고 외칠 때 만원 버스에서 토큰을 움켜쥐고 정류장을 놓치지 않으려 사람들을 뚫고 치열하게 내리던 순간이 흘러나왔으리라.


내 속에 얼마나 많은 단어들이 숨어 있을까. 깊이 남아 있는 강력한 단어들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그 단어를 만나면 내가 깨닫지 못한 상처의 흉터까지 흐려져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의미로 남아 있는 숨은 단어를 알게 되는 일은 어른이 된 내가 어린 나를 만나는 순간일 것이다. 그 순간이 또다시 온다면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살피고 위로하련다. 그 어느 만남보다 더 소중하고 극적인 순간이기에.


포인세티아를 만지던 어르신의 수고로 12월을 빛내 줄 붉은 포인세티아 화분이 완성되었다. 오늘 기억이 즐거운 단어로 숨어 있기 바라며 완성된 포인세티아 화분을 품에 안고 있는 어르신의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를 본다. 붉은 색감, 식물과 흙에서 생기를 얻은 어르신의 눈이 수업 전 보다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