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
한동안 나는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버린 채 살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잠들고 싶었고, 밥을 삼켜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가 흐르는 대로 내 존재 역시 무기력하게 떠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자조 섞인 말이 환청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떤 감정도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고, 그 어떤 일도 바카라임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한참 멀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스크롤을 내리던 SNS에서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우리가 남는다면, 그건 살아낸 용기다."
그 짧은 글귀가 나를 조용히 멈춰 세웠다.
아, 나는 그동안 그저 무너지기만 했던 게 아니었구나. 그 무너진 자리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던 거였구나.
살아낸다는 것은 거창한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도 어떻게든 버텨냈다는 그 사실 하나면 이미 충분했다.
그 자각은 작은 햇살처럼 캄캄했던 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주 작고 조용한 삶을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하루에 한 잔, 내가 좋아하는 차를 정성껏 우려 마시는 시간.
기억 속 어딘가에 묻어두었던 바카라을 다시 펼쳐 잊고 있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
까맣게 잊고 지냈던 노트를 열어 짧은 단어와 문장을 끄적여보는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소한 행위들이었지만, 그 작은 행동들이 내 안의 무너진 벽돌을 하나씩 다시 쌓아 올려주고 있었다.
나를 위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조용한 회복의 시작이었다.
남편과의 관계는 여전히 차가웠다.
대화는 필요할 때만 기계적으로 이어졌고, 감정은 서로의 시야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하지만 이제는 그 틈을 억지로 메우려 애쓰지 않는다.
예전의 나는 '함께'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것을 참았고, 포기했고, 혼자 견뎌냈다.
하지만 이제는 내 감정 하나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지켜주기로 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아야만 비로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나도, 아픈 나도, 존재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서서 웃는 연습을 해보았다.
예전엔 자연스럽던 미소가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남의 카메라 앞에서 억지로 지어 보이던 웃음이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지어 주는 표정. 내면에 깃든 작은 온기가 서서히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기약 없는 기다림 대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감'을 선택한다.
아직 완전히 괜찮지는 않다.
여전히 상처는 흉터로 남아있고, 때때로 벼락처럼 아픔이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다시 나답게 살아가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작고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다시 살아보기로 했다, 나답게."
이 작은 고백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그리고 나와 같은 기나긴 계절을 건너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이 글이 따뜻한 울림으로 닿기를 바라며, 나 역시 이 길 위에서 묵묵히 진짜 나를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