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나는 나니까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흘렀다. 봄이었고, 여름이었고, 어느새 지금은 가을이다.
계절이 몇 번을 바뀌어 흘러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같은 집,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삶이 하루아침에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아침이면 이불속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누군가의 임신 소식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일렁인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이제 예전처럼 나를 송두리째 덮쳐 무너뜨리지 않는다.
통증은 여전하지만, 그 고통을 건너는 나의 방식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 애쓴다.
슬픈 날엔 주저 없이 울고, 외로운 날엔 고요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버거운 날엔 잠시 모든 것을 멈춰도 된다고, 나 자신에게 다정하게 말해주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이전의 나는 늘 참고, 감추고, 괜찮은 척해야만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안다.
진정한 사랑은 나의 아픔을 솔직하게 터놓고 손을 내밀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남편과의 관계에는 여전히 명확한 정답이 없다.
가끔은 짧은 대화를 나누고, 가끔은 서로의 시야에서 멀어져 각자의 공간에 머문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그 사이에서 모든 감정의 균형을 억지로 맞추려 애쓰지 않는다.
함께 걷는 길이라 해도 각자의 속도가 다를 수 있고, 감정의 결이 다를 수도 있음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더 이상 나만의 잘못이나 부족함으로 돌리지 않기로 했다.
예전의 나는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나를 맞추느라 스스로를 깎아내렸고, 진정한 내 모습을 숨기며 살았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나의 감정, 나의 생각, 나의 삶을 조금 더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꺼내어 놓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들에 솔직해지기로, 내가 느끼는 작고 불완전한 감정들조차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 모든 용기의 과정이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음을 느낀다.
내 삶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가끔은 허우적대며, 어떤 날은 다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강요된 회복이 아니라, 오롯이 나 스스로를 위해 다시 숨을 고르고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런 삶을.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조차 내게는 작고 소중한 회복의 과정이다.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고, 이제는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든 나 자신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갈 것이다.
멈춰버린 줄 알았던 정거장에서, 나는 이제 나만의 속도로 다시 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