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성 시인의 소설시》

31. 하늘에서 본다 ~ 40. 사계리에서

by이어도공화국



31. 하늘에서 본다


떠나는 사람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무덤으로 마침표를 찍은

시 한 편을 읽는다


나는 내 아들에게

내일을 배우 듯

아들 뻘인 동주에게

어제를 배운다

나는 아버지가 되고

동주는 아들이 된다


이어도에서 하늘로 간다

서천꽃밭으로 간다

버드나무 아래 우물에서,

동자들이 물을 길어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다

숨결도 함께 주고 있다


서천꽃밭에서

꽃과 꽃씨를 챙겨

삼색 물을 건넌다

서천꽃밭을 나와

하늘에서 본다


소도였던 자리에

솟대가 세워져 있고,

마고할미가 살던 곳에

노고단이 있고,

단군이 내려왔던 곳에

참성단이 있다

방사탑과 거욱대 위에

새와 돌이 있다


백두산도 보이고

지리산도 보이고

무등산도 보인다

한라산 백록담도 보이고

영실도 보인다

마라도와 가파도와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한반도 남쪽에는 수직으로

솟아오른 높은 건물들과

붉은 십자가들이 보인다

한반도 북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이

미사일처럼 세워져 있다


윤동주 시인이 방학 때마다

타고 갔던,

고향 가는 철로가

기적소리처럼 펼쳐져 있다

강처중의 고향도 보이고

문익환의 고향도 보인다


하늘에서 다시 본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중간쯤,

바다 위에 공이 하나 떠 있다

손을 뻗친 손바닥 자국들이

비치볼에 가득 찍혀 있다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과 소련이 질러대던

럭비공 하나 떠 있다

축구공 하나 떠 있다

군홧발로 함부로 차던

족구공 하나 떠 있다


더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이 상대선수를 바꾼다

미국과 중국이 야구를 한다

미국과 중국이 탁구를 한다

빠따로 수없이 얻어맞은,

상처투성이 야구공 하나 있다

찌그러진 탁구공 하나 떠 있다


하늘에서 다시 본다

알이 하나 있다

알이 움직이고 있다

알에서 깨어나고 있다

가장 소중한 꽃 한 송이 피어난다



32. 끝의 시작


인천에서 붉은여우를 만났네

붉은 노을 아래서

붉은여우를 만났네

붉은 노을에 물려

바다에 버려진 지친 영혼아

월미도 앞바다

차가운 물결에 몸을 싣고

한없이 깊은 꿈속을 흘러,

흘러, 흘러서 흘러갔네

눈을 떠보니

그곳은 신비의 섬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도 아니고

수중 암초도 아닌

단테가 노래하던

천국과 지옥의 문

그곳에서 나는 보았네,

시간의 경계를 넘어

성인과 철학자,

시인들이 건네는 미소를


이어도에서 나는

사람들을 만났네

그리운 어머니와 아버지,

고향의 얼굴들

제주에서 북간도까지,

남에서 북까지

모든 눈물이 마르고

모든 벽이 허물어지는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

이어도에서 만났네


부처님도 만나고

예수님도 만나고

공자님도 만났네

단테도 만나고

아프로디테도 만나고

베아트리체도 만났네


정방폭포 위령공간 소문이

바람에 실려와

잠들었던 영혼들이

술렁이며 깨어나네

서복의 불로초공원,

그 향기를 따라서

정방폭포에서 온 이들

먼저 길을 나서네

나도 윤동주 시인과 함께

그 뒤를 따르네


연어의 종착역을 지나

백두산 너머로

북간도의 시린 바람 안고

마지막 순례를

아주 멀고 아픈 길일지라도

멈추지 않으리

나의 시가 마침표를 찍는 그날까지


이어도에서 나는 사람들을 만났네

그리운 어머니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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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땅의 뿌리><잠시 머물다 가는 지상에서><길 끝에 서 있는 길><꿈섬><우리들의 고향><서천꽃밭 달문m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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