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성 시인의 소설시》

21. 우주 달력에 쓰는 이어도 ~ 30. 마지막 순례

by이어도공화국



21. 우주 달력에 쓰는 이어도


우주 달력 한 장을 펼치면

138억 년의 시간이

12개월 안에 접혀 있다


1월의 어둠에서 별이 태어나고

9월의 어느 날,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 하나가 생겨났다


그리고 마지막 날

12월 31일 밤이 되어서야

사피엔스가 나타났다


우주의 시계로 보면, 인간의 역사는, 자정 직전의 한순간,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불을 발견하고, 언어를 만들고, 신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돈을 만들고, 서로 모르는 사람들과도 하나의 이야기를 믿으며 거대한 문명을 세웠다 유발 하라리는 묻는다 인간이 밀과 쌀을 길들인 것인가 밀과 쌀이 인간을 길들인 것인가


우리는 밭을 일구었지만 밭은 우리의 시간을 일구었고 곡식은 우리의 발목에 정착이라는 이름의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사피엔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돌도 창도 아니었다 함께 믿을 수 있는 허구였다


신도, 국가도, 돈도, 민족도, 국경도, 어쩌면 문학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믿을 때,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나의 이어도 또한 하나의 이야기일까 나는 나의 이어도와 이어도공화국을 쓰기 시작한다



22. 한 아이


한 아이를 알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한 아이의 비밀을 알고 있다 한 아이의 아픔을 알고 있다 그는 나밖에 몰랐다 나 또한 그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어쩌면 나인지도 모른다 그는 서럽도록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들풀 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오직 그와 나밖에 몰랐다 그의 삶은 우리나라 현대사와도 같았다 그는 죽도록 사랑하는 일과 그리하여 매일 밤 유서를 쓰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할 줄 몰랐다 다른 일을 해보려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람에 쓰러질 때마다 유서를 쓰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살아 있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그는 편지와 유서를 썼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가야 할 길이라면 어디든지 가보고 싶었다 뛰어가고 싶었다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또 다시 아무도 모르게 쓰러졌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쓴 유서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가족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어느 날 문득 가출을 결심했다 그와 나는 함께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꿈길까지라도, 저승길까지라도……,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리고 수 없이 많이 달아났다 우리들은 오늘도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는 또 다시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벌한 평화 속에서 60년 넘게 함께 살아왔다 아직도 그의 투병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잠든 사이에 나는 그의 투병일지 혹은 유서들을 훔쳐내는데 성공했다 참으로 숨죽이는 순간이다 조심스럽게, 이 비밀들을, 속삭이고 싶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오늘도 유언처럼 발설하고 있다 이제 막 새로 태어난 길이, 빈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다



23. 연어의 종착역에서


나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고


조태일 시인의 고향집 앞에는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이 있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와

붉은 알을 낳으려 하고


조태일 시인은 먼저 돌아가

하늘에서 식칼을 갈고 있네


나는 서천꽃밭에서 대나무 가꾸고

조태일 시인은 국토에 시를 가꾸네


오늘도 곡성, 강은 연어를 품고

은하수는 숫돌물로 흐르고 있네



* 조태일 시인 27주기 추모시 (걸개 시화)



24. 종남마을에서


당오름 아래, 종남마을에서

나는 문득 종남이 생각이 난다

봉천수(奉天水)처럼 살았던 친구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하얀 종소리 떨어뜨리며 번지는 향기,

사람들은 그것이 때죽나무라 하였다

떼로 죽어간 이름들이 맺혀 핀 꽃이라

지금도 집안에는 함부로 들이지 않는,

마당가에 심으면 통곡이 자란다는,

종나무를 따라서 내 마음은 벌써

그 억울한 이름의 뿌리를 따라서

볼레오름 종남궤로 올라가고 있다


불타버린 집터마다 팽개쳐진 통시,

주인 잃은 돗통시에는

굶주림에 꺼이꺼이 울던 검은 돼지 소리만

눈물처럼 고여 대나무를 키우고 있다


살기 위해 굴속으로 기어들던 발자국마다

주린 돼지의 울음이 겹쳐 들리고

부서진 항아리 틈으로

죽창처럼 솟아난 대나무만 무성하다


때죽나무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 거친 곶자왈에 뿌리박아

해마다 잊지 않고 피어나는 서러운 꽃

해마다 지상으로 종소리 하얗게 쏟아내는 꽃


종남궤의 어두운 통곡의 벽을 넘어

빈 통시를 채우던 슬픈 짐승의 울음까지

이제는 제주의 흙 속에 깊이 묻어두고,

우리는 다시 삼월의 바람으로

그 아픈 이름들을 하나씩 지켜내고 있는데,


종남아, 지금 어디에 피어 있느냐

돼지우리 위에서 설사똥을 싸던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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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땅의 뿌리><잠시 머물다 가는 지상에서><길 끝에 서 있는 길><꿈섬><우리들의 고향><서천꽃밭 달문m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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