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느끼러 떠난 태백산

느리게 오르는 산

byJosephine

가을의 태백산은 느리게 오르는 산이다.



출발시간 새벽 4시 14분. 가을산을 놓칠세라 우리 부부는 서둘러 태백으로 떠난다. 세 시간을 잡고 길을 나섰다.

하늘은 빠르게 밝아지는 중이다.

8시 30분.

유일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오를 준비를 마쳤다. 기분 좋은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 이 묘하고도 중독적인 감정을 안고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임도를 따라 사부작사부작 걷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풍경에 비해 그리 만만한 걸음은 아니다. 평소 잘 걷지 않는 오르막 길을 걸으면 종아리부터 긴장이 올라온다. 경사진 길에 자꾸만 허리가 앞으로 굽어지는 것 같아 우리는 등산스틱을 짧게 접어 열중쉬어하듯이 뒤로 잡고 가슴을 펴면서 올라간다. 그래도 숨이 턱턱 찬다.


2km. 1시간 정도 이 잘 닦인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유일사 쉼터가 나온다. 유일사로 내려가는 나무 데크 계단을 정면에 두고 우리는 왼쪽으로 길을 잡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천제단 정상까지 1.7km.


경사는 많이 가파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큰 산들에 비해 돌계단이 놓여진 간격이 촘촘하고, 돌이 없는 공간은 나무계단을 놓아서 다리의 피로가 한결 덜하다. 이 나무계단 정말 칭찬한다. 덕분에 체력을 많이 아끼고 산행의 즐거움이 더 커졌다.


오르는 동안 우리는 자주 걸음을 멈췄다. 앞에서 걷던 남편이 몇 발자국 못 가고 뒤를 돌아보게 만들 만큼 나는 자주 핸드폰을 들었고, 걸음을 올릴 때마다 난생처음 단풍을 보는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된다. 이 산은. 걸음마다 우리 앞에 놓여지는 색감들을 그저 노랑과 빨강이라고 말하기엔 어쩐지 표현이 부족하다. 산은 지금 각자의 속도대로, 나름의 시간 속에서 그만큼의 변화만큼 물들어 가고 있다. 우리도 그 가을로 더 깊이 걸어간다.


등산로가 시작된 초입 구간은 산이 무성해서 시야가 크게 트이지는 않는다. 그러다 나무들 사이로 사진처럼 태양빛이 쨍하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그 순간을 차마 모른 척 지나칠 수가 없어 또다시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렇게 걸음이 자꾸만 느려진다. 걸음이 느려져도 조급한 마음은 없다.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은 이 산의 찬란한 색감이 보면서도 아쉬울 정도니까.

1시간 정도 이 변화무쌍한 나무들을 따라 숨을 고르며 꾸준히 오른다.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옆을 지나는 나무들의 키가 낮아지고 시야가 트이면서 큰 산의 수문장 같은 주목 군락지를 만나게 된다. 이제 정상이 멀지 않았다는 신호다. 오르막 계단을 다 오르고 주목 군락지를 지나 낮은 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몇 분만 걸으면 길이 평평해지면서 장군봉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장군봉은 표지석에 새겨진 글자에서도 기백이 느껴진다. 태백산은 볼 수록 기세 그 자체다. 고도 1567m. 태백산에서 가장 높은 고지. 이미 정상을 밟은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천제단을 안 가볼 수는 없다. 탁 트인 산의 능선을 따라 완만한 길을 5분만 더 걸으면 저 앞에 보이는 천제단의 정상을 만날 수 있다.


드디어 존재감 확실한 천제단의 정상석을 만난다.

정상이 추울까 봐 점퍼도 따로 준비해 왔는데, 햇살은 포근하고 바람은 약하다. 완벽한 날이다. 외국인 커플부터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아이들까지 가족단위 등산객들도 이미 정상에 많이 도착해 있다. 운이 좋아 빠르게 정상에서 사진을 남기고 돌아서니 정상석 앞에 사진 대기줄이 생겼다.

천제단이 있는 정상부가 잔디마당처럼 평탄해서 앉아서 쉬기에 좋았다. 다만 그늘이 1도 없다. 챙이 달린 모자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아마 하산길에 요기를 하자고 했을 정도로 햇볕이 강렬하게 내려왔다. 정상부에 빙 둘러진 돌에 앉아 사진도 더 남겨보고 음식도 먹고 얘기도 하고, 올라오면서 보고 느낀 가을정취에 대한 남은 요란을 마저 떨어본다. 등산 초입에서 임도를 오르면서 "그냥 집에서 쉴 걸 괜히 왔어. 생각보다 힘들어."하고 투덜 대던 나의 방정맞은 입은 어디 가고 이 산은 겨울에 다시 와야 한다고 난리법석이다.


"안 왔으면 어쩔 뻔했니... 진짜 가을색이 너무 예쁘다."

"예쁘다는 표현이 진짜 작다 작아."

하산하기 아쉬울 정도로 소풍 나온 듯한 기분에 젖어 삼십여분 쉬었다. 아쉽지만 이제는 정말 내려가야겠다.

우리 부부는 오늘도 아들의 스카우트 가방을 하나씩 나눠 메고 이 산에 왔다. 가방을 챙기고, 하산을 준비하는데 남편이 슬슬 또 발동을 건다. 계획대로라면 유일사 쉼터를 지나 유일사 주차장으로 원점회귀 할 것인데 느닷없이 새로운 코스도 보고 싶으니 망경사 방향으로 내려가서 백단사 주차장으로 하산을 하자고 한다. '나는 언제쯤 이런 것을 좀 말릴수 있을까' 선뜻 또 따라나섰다. 그 가벼운 '예스'가 이 멋진 등반의 완벽한 감동을 날리는 시작이었다.

망경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초반은 좋았다. 오늘따라 컨디션도 좋았고, 망경사에 들러 시원한 약수도 마셨다. 그렇게 시작된 백단사 주차장 방향의 등산로는 작은 산의 오솔길처럼 평화롭고 완만했다.

망경사의 전경과 망겨사에서 이어지는 하산로(백단사주차장 방향)


단풍구경에 정신이 팔려 사진을 또 얼마나 찍어 댔는지! 하지만 이 역시 잠깐이었다. 일관되게 이어지는 내리막 길이 백단사 주차장까지 약 4km 끊임없이 이어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비탈길의 경사는 구간마다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30도 이상의 경사도로 보였다.


등산화 끈을 단단히 고정해 묶었지만 급한 비탈경사에 슬슬 발가락이 아파왔다. 무릎에는 힘이 들어가고 힘주어 아래로 내리 걷는 바람에 허리가 뻐근할 지경이 되었다. 새로운 풍경을 고수하던 남편도 고역이긴 마찬가지다. 뒤로 걸어보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가파른 경사다.


'그럼 그렇지... '

오늘은 길을 잃지는 않았지만 발가락을 잃을 지경이다.


나는 이미 지난 수리산 종주에서 새끼발톱도 하나 빠진 상태인데 걸어도 걸어도, 내려가도 내려가도 하산길은 끝이 없다.


"꽁이라곤 없는 이놈의 야박한 산!"

이 길을 추천한 남편의 입에서도 야속함이 묻어 나온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좀 편하게 걸을 수는 없었나요?


겨우겨우 도착한 백단사주차장은 휑하다. 아~무도 없다.


안내문이 흘러가는 전광판과 화장실만 덩그러니 있고 태양은 뜨겁다. 우리는 다리를 절며 주차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철퍼덕 앉아 카지노택시 어플을 열었다. 택시가 순식간에 잡혀서 반가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유일사 주차장까지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이동하고 택시비는 7,900원이 나왔다. 감사한 마음에 배낭을 열어 초코바를 하나 기사님께 드리고는 감사의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우리의 몰골이 대단했던 것인지 기사님이 돌아서 허허 웃으셨다. 분명 초코바 때문은 아니다.


유일사 주차장에서 등산화를 벗고 떠날 채비를 금방 마쳤다. 지친 남편도 변명이 궁색한지 고단 할 텐데도 곧장 집으로 길을 나선다. 오늘도 피하지 못한 황당한 고생길에 웃음이 터진다.


잘 있어 태백산~ 겨울에 또 올게!


태백산 유일사주차장-유일사 쉼터-장군봉-천제단 정상-망경사-백단사 주차장 하산

산행 거리 대략 9km, 소요시간 5시간 30분

고도 1567m


걸음마다 사진을 찍었듯이, 문장마다 사진을 가득가득 싣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된다. 이산은.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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