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소백산

절대고요의 경이로운 순간을 마주하다

byJosephine

겨울산에서

경이로운 아름다움과 숨 멎는 무서움을 함께 만났다.

그 겨울의 초입에서 만난... 그 산이 그랬다.



어쩌면 산은 우리 부부에게

삶에서 도전하는 가장 작고도 유일한 하나의 모험 같은 것이다.

보통은 왕복 서너 시간 정도의 야트막한 산행을 오랫동안 즐겨 왔는데


그날은 문득, 멀리 떠나보았다.


꽤나 서두른 줄 알았지만, 아침 6시가 넘어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단양에 들어서고,

다리안관광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넘은 시간.

배낭에 이것저것 필요할 것들을 욱여넣으면서 채비를 마치니

시간은 이미 오전 10시가 가까웠다.


이 때도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천동탐방센터 안내부스 앞에서

"오늘 많이 추워요~" 하는 직원분의 당부를 끝으로 드디어 소백산에 들어섰다.


우리는 오늘, 해발 고도 1,440m 비로봉에 오른다.

왕복 예상거리는 14km. 시간은 6시간 반 정도다.

(적어도 이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차갑고도 상쾌한 공기가 가득한 소백산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척 포근한 인상이다.

길 옆으로 흘러내리는 계곡 물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사부작사부작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은 산인지라

초입부터 시작된 오르막이 일관되게도 꾸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느새 허리가 앞으로 조금 굽어진 모양으로 숨이 가팔라지도록 땀을 한 바가지 쏟아냈을 때,

벤치와 따뜻한 화장실이 있는 중간 쉼터를 만난다.

(오르막을 4km 정도 오른 지점이었다)


출발지점에서도 우리는 겨울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아직은 늦은 가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 고도를 조금씩 오를수록 신기하게도 겨울이 빠르게 다가왔다.

소백산 천동탐방센터 등산코스 초입의 풍경


이 코스의 진짜 등산은 중간쉼터를 지나면서부터라고 봐야 한다.

완만하고 잘 정돈된 길은 더 이상 없다.

바짝 다가온 겨울과 돌이 가득한 너덜길을 3km 정도 더 올라야 한다.


예상치 못했던 겨울풍경에 남편은 상고대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 쌓인 돌길을 오르는 것은 예상보다 더 힘이 들었다.


단언컨대, 그날 함께 그 산에 오른 모두가 우리를 지나쳐 갔다.

이미 정상을 보고 하산 중이던 몇몇 등산객 분들은, 벌겋게 달아 오른 우리 부부의 얼굴을 보면서

지금 정상이 몹시 춥고 바람이 강하며 많이 미끄럽다는 당부를 남기고는 또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고도가 오를수록

나무의 키가 낮아지는 것이 확연하게 눈에 보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늘을 가리던 나뭇가지들이 가시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정상에 오른 듯이 설레었다.

물론 그 뒤로도 정상은 한참을 더 올라야 했다.


그 길 끝에서 마주한 고사목


이 고사목을 지나면서 앞서가던 남편이 갑자기 뒤를 보라고 말했다.

무심코 돌았을 때, 먼 산그림자와 유화처럼 펼쳐진 비현실적인 새 파랑 앞에서

울컥 눈물이 솟는다. (우습게도 아마 여기가 정상인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아직 정상은 멀었다.

이 고사목 기점을 지나면서 쌓인 눈은 발목을 넘었다.

눈길에 발을 폭폭 묻어가며 굽이굽이 놓인 데크계단을 그 후로도 한참 올랐다.


고사목을 지나서도 1km는 더 걸었을 것이다.

드디어 만난 정상봉.

사실 정상봉에 기대어 나도 사진을 한 장 남겨 보았지만

그 너덜 해진 모습을 차마 이곳에 실을 수 없어 오늘은 그저 덩그러한 정상봉의 모습만 남겨본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출발했던 우리는

어느새 겨울의 한가운데 있었다.

함께 올랐던 많은 분들은 이미 하산을 시작했지만

우리는 허기진 몸을 우선 해결해야 했다.

정상 천동삼거리 아래 부근에 매서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전망대를 만났다.

준비해 간 간단한 음식과 믹스커피 한잔에 감동과 설움이 올라온다.

감동은 알겠는데, 설움은 출처를 모르겠다.


그 바람 부는 설산에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에게는

서로의 숨소리와 믹스커피의 달달한 향 밖에는 없었다.


남편이 문득 입을 뗐다.

'절대고요'라는 말이 생각난다며...


새파란 하늘에, 들리는 소리는 바람소리뿐이고

하늘을 가르는 몇 마리의 새까만 까마귀들

그리고 우리의 숨소리.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닌데

아무 소리가 없는 듯한 절대의 고요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 고요함 속에는 뭐랄까. 경험하지 못한 벅참과 경이로움이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순간을 경험하고 싶어서 산에 오르는 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벌써 오후 3시 30분을 지난다.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서둘러 배낭을 챙기고 폭폭 빠지던 눈길을 되짚어 돌아온다.

너덜길은 끝이 없고 발목은 시큰거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집중하면서

겨우 아까의 그 쉼터에 도착했을 때 한 시간 반 가까운 시간이 흘러버렸다.

슬슬 해가진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면서도 별 일이 없을 거라는 막연하고도 안이한 생각에

잠깐 쉼터에 앉아 길을 보채는 남편에게 떼를 썼다.


이제부터 등산로 입구까지는 쭉 평탄한 내리막뿐이니

훨씬 빠르고 쉬운 하산이 될 줄 알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모든 기억이 그렇게 꽤 정확하지는 않다.

심지어 한나절 앞의 아주 가까운 기억일지라도 말이다.


처음 겪는 힘든 산행 끝에 다시 걷는 내리막은

아까의 평탄한 내리막이 아니다.

한 발을 앞으로 디딜 때마다 무릎에 전해지는 통증이 상당했다.

역시 우리는 허약한 초보였다.

뒤로도 걸어보다가 한발 한 발을 힘주어 신중하게도 내려와 보다가


그러다가 결국, 다섯 시 반쯤 해가 졌다.


어두워진 산속에서 나의 허접한 워치는 이미 수명이 다해 꺼져버렸고,

덩달아 오래 쓴 핸드폰 마저 배터리가 없어 아웃인 상태다.

'보조배터리를 챙길 생각은 못한 걸까' 후회도 의미 없는 순간이다.


다행히 남편의 핸드폰이 살아있다.

후레쉬를 켜고 길을 더듬는다.

처음에 몇 분 간은 그저 어둑한 느낌에 좀 웃기도 했던 것 같다.

이 황당한 순간이 떨리면서도 호르몬이 치솟는 것 같은 희열도 잠깐 스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지금 이 산에 우리가 있는 걸 아무도 모르는 건가?"

"어디 cctv 같은 것도 없을까?"

낭만적으로 들리던 청량한 계곡의 물소리도 어느새 좀 무섭다.

까만 산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나 짐승의 부스럭 대는 작은 소리에도 머리끝이 곤두선다.

그렇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어둠이다.


아직 갈길은 3km가 남았는데 해가진 깊은 산속은 정말 막막하고 깜깜했다.


아들의 초록색 스카우트 배낭을 나눠 메고, 어설픈 체력을 장전한 우리는 그렇게 영원 같은 3km를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함께 걸었다.

결국, 끝날 것 같지 않던 어둠의 끝에서 아침에 마주했던 작은 부스의 불빛을 만났다.


'그 순간에 내가 울었던가?'

진짜 눈물이 찔끔 났건 건지, 울고 싶을 만큼 반가웠던 건지

그 감동과 안도의 순간을 정확히 기억해 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 얘기는 되새길 때마다 참.. 한심하고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매번 벅차고 재미나고 호르몬 치솟는 짜릿함이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우리는 더 이상 웬만하면 낮은 산을 타지 않는다.

생전 도전하지 않던 종주산행도 기획해 보고

시간이 허락하는 날은 가급적 종일 산에 있는 것이 더 행복해졌다.

어쩌면 일종의 '중독'같은 것에 걸려 버렸다.


소백산 정상에서 뜻밖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해가 진 산에서 원초적인 무서움을 겪은 그날

산은 분명,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남겼다!

소백산 비로봉 정상부의 상고대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