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드니 디드로, 바보(The Pool)

by봄날

봄의 변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10대, 20대, 30대에 읽으면 전혀 다른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유명 소설뿐 아니라 조선 민화의 화조도나 바카라거리 그림을 보거나, 길가의 사소한 네잎클로버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대상은 그 위에 우리가 부여한 지식, 기억, 경험에 따라 의미가 주관적으로 변하고, 그에 따라 가치도 달라진다. 어떤 대상은 때로 의지가 되기도 하고, 생명이 되기도 하며, 기능이 되기도 한다.

드니 디드로에게 대상의 의미와 가치는 감각적인 경험과 기억, 그리고 관계 속에서 형성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전히 주관적이거나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감수성 있는 물질로서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그 과정에서 특정한 ‘관계의 지각’이 미적·실천적 의미를 만들어낸다.

디드로는 인간을 감각을 통해 인식하고 변화하는 물질적 존재로 보며, 뇌를 평생의 감각과 학습이 축적되는 ‘백과사전적 저장소’로 이해한다. 삶을 관통해 축적된 기억들이 ‘나’라는 동일성을 만들고, 그 기억이 새로운 지각 위에 계속 겹쳐지면서 대상의 의미를 조금씩 바꾸어간다고 본다.

디드로는 미적 경험의 원리를 대상 자체에 고립된 성질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포착하는 ‘관계들의 지각’에 둔다. 두 음 사이의 간격, 색과 형태의 배열, 인물과 배경 사이에 생기는 긴장 같은 관계 구조를 파악할 때 쾌나 감동이 발생한다.


변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동시에 사람은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꺼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다 변해버리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 역설적인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느낌은, 익숙한 의미 구조를 지키려는 심리와 너무 빠르게 변하는 외부 세계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변화 그 자체라기보다, 내가 붙잡고 있는 의미 체계가 무너지지 않는 것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대상이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변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다. 편리한 시설, 깔끔한 디자인, 사람 친화적인 상품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현대 슬롯에서 시설·디자인·서비스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데, 실제 경험에서는 “좋아지고 있는데도 불편하다”는 역설적인 반응이 종종 나타난다. 이때 불편한 것은 기능이 아니라, 그 기능에 계속 적응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다.


신성화

사람들은 진리나 규범 같은 것이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라 믿고 싶어 한다. 아니, 이미 그렇게 신성화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변화에 대한 거부감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익숙한 해석 틀을 지키려는 방어와 깊이 관련된다. 새로운 제도, 상품, 공간이 등장하면, 우리는 그 물건 자체보다 “이것이 내가 알던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를 먼저 떠올리며 불안을 느낀다.

‘진리’나 ‘규범’에 대한 신성화는, 그것들이 실제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여길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믿음은 “언제까지나 이 의미를 함께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굳이 말하자면, 세계가 조금 더 편해지고 아름다워지되, 그 변화가 자신이 믿어온 중심 의미—“나는 이런 사람이다”, “세상은 이런 곳이다”—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바라는 데 더 가깝다. 변화를 향한 열망과 의미의 지속을 향한 갈망이 동시에 작동하는 그 긴장이 바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체감으로 드러나는 듯하다.



디드로는 인간의 판단과 행동이 오랜 습관과 슬롯적 편견에 의해 깊이 형성된다고 보았고, 일상의 도덕과 규범 대부분이 “우리가 평생 들어온 말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사람은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라 믿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부터 몸과 감각에 새겨진 습관과 주변에서 계속 들려온 말·규범을 거의 자동적으로 재생산하는 존재에 가깝다.

그래서 사소한 제스처, 말투, 옷차림, 소비 방식이 기존 질서와 엇나가 보일 때,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한지 혹은 합리적인지보다 먼저 ‘규범에 어긋나는가’를 감지하며 거부감을 느낀다. 디드로의 대화편 《라모의 조카》에는 슬롯가 중간 정도의 평범함과 익숙한 도덕을 유지하려는 힘, 그리고 그 질서를 어기는 인물에게 쏟아지는 조롱과 불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요즘은 1년만 지나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어쩌면 앞으로는 2시간마다 신속하게 적응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나 규범이 과연 있을까.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커피를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마치 몇십 년 전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던 어른들처럼, 그때는 그것이 별로 문제 되지 않았다. 한때 아름답다고 여겨지던 미술 작품들이 지금은 그저 그런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수많은 기업과 플랫폼이 나타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우리는 다음이나 네이버, 인스타그램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영애, 강동원, 전지현, 원빈 같은 배우들이 후대에도 같은 평가를 받을 거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디드로는 어떤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신성화하기보다, “어떤 조건에서, 누구에게 이롭고 누구에게 불리한가”라는 질문으로 그것을 해부하려 한다. 오늘 당연하던 관행이 내일은 금지되거나 미적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슬롯적 합의와 감수성이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의 기준도 변한다

디드로의 미술 평론을 보면, 어떤 시대에 걸작으로 추앙받던 작품이 이후에는 과장되었다고 평가되거나, 당시에는 이단처럼 보이던 작품이 나중에 진가를 인정받는 과정을 선명하게 목격할 수 있다. 그는 미를 ‘대상 안에 영원히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니라, 관객의 감각·도덕감·지식수준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관계적 경험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지금 ‘예쁘다’고 여겨지는 배우나 오늘의 인스타그램·네이버 같은 플랫폼이 후대에도 같은 존경과 매혹을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몸과 얼굴에 대한 미의 기준, 유명세의 방식, 이미지를 소비하는 기술 환경이 모두 바뀌면, 오늘의 ‘이상적 미’는 어느 순간 특정 시대의 취향으로만 남게 된다.


간격

사유가 변하는데 세상이 변하지 않을 리 없고, 세상이 변하면 우리는 변하고 싶지 않아도 끊임없이 적응해야 한다. 결국 계속 적응하길 거부할 것인지, 아니면 그 변화에 맞춰 적응하려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어쩌면 직관과 감각을 따라 행동하면서, 정보와 감정이 뒤섞인 채 살아보는 것도 한 방법일지 모른다.

이 봄에 새 숲과 벌레들이 분주히 나부끼고 있는데, 우리까지 일부러 들떠 새삼스럽게 소란스러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잠시 관망하다가, 필요할 때 천천히 따라가면 그뿐이라고 마음을 내려놓는다면, 변화에 조금 더 부드럽게 순응할 수 있지 않을까.

‘관망’은 냉담한 방관이 아니다. 세계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며, 그 리듬에 자신의 몸과 정동을 맞추기 위한 준비 단계에 가깝다. 잠시 멈춰 바라본 뒤, 나중에 따라가겠다고 마음을 고르는 태도는, 변화의 속도는 내가 정할 수 없더라도 내가 숨 쉴 간격만큼은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의 순응이 된다.


*'정동'(情動, Affect)은 심리학·철학에서 감정, 정서와는 다른, 언어화되기 이전의 미묘한 신체적·역량적 움직임이나 강도를 뜻함

*‘정동’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원초적인 느낌의 힘, 즉 감정이 언어·생각·의미로 굳어지기 이전의 에너지 같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 기분, 분위기, 긴장, 떨림, 끌림 등으로만 어렴풋이 느끼는 “무엇인가의 작동”에 더 가깝다.


디드로는 성격과 도덕적 성향이 오랜 습관과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면서도, 인간을 전적으로 기계적인 결정론에 가두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조건과 감정을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습관을 조금씩 바꾸려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감각과 직관을 폄하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이 감각·정동·상상력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드로는 추상적 체계보다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며 판단을 수정하는 관찰자의 태도를 중시했다.

감각과 직관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왜 이런 느낌이 드는가, 이 선택이 나와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덧붙이길 요구한다. 정보와 감정이 뒤섞인 채 살아가더라도, 가끔은 한 박자 늦추어 그 혼합물을 바라보는 짧은 성찰의 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철학은 늘 생각의 중심을 '자바카라'보다 '풍요'에 둔다.

자신의 길이 많이 변했다고 해서 굳이 자바카라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슬롯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 같을 수도 있고, 반대로 남들보다 앞서 나간 것 같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언제나 미련과 후회를 동시에 안고 산다. 삶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처음 생각한 길과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반성이나 자바카라의 근거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길이 많이 변했다’는 자기비판보다는,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삶을 어떻게 성실하게 구성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디드로는 인간을 일생 동안 감각과 경험을 축적하며 자신을 다시 쓰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한 번 정한 진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곧장 실패로 규정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습관도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선호하는 직업, 취미, 작품, 상품, 기업, 플랫폼은 모두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과 슬롯가 원하는 것, 특히 교사와 부모가 권장하는 것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나이가 30대든, 40대든, 50·60·70대이든, 수십 년 동안 하루하루를 꾸준히 쌓아가야 할 일이다.

디드로 역시 20·30대에 정한 한 길만 곧게 걸어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도·번역가·소설가·철학자·미술 비평가·백과사전 편집자 등 여러 역할을 넘나들며 변주된 삶의 경로를 걸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과학·예술·정치 문제에 대한 글을 쓰며, 늙어가는 몸과 변하는 사유를 끝까지 실험한 인물로 평가된다.


바보(The Fool)

타로 카드의 ‘바보(The Fool)’는 메이저 아르카나 0번 카드로, 새로운 시작과 순수한 자유를 상징한다. 이 카드는 무한한 가능성과 모험을 나타내며, 과거의 짐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를 강조한다. 바보 카드는 낙천적이고 순수한 에너지를 담고 있으며, 새로운 여정이나 기회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디드로의 철학이 말하는 ‘변화하는 인간’과 바보 카드가 상징하는 ‘새로운 시작’은 묘하게 닮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의미를 찾고, 그 의미가 흔들릴 때마다 불안에 휩싸이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 역시 변화하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과거의 진리에 매달리지 않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감각과 직관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보의 지혜이자, 디드로가 말하는 성실한 삶의 태도일지 모른다.



디드로는 당신은 어떤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어떤 습관을 만들며, 어떤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묻는다.

변화는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붙잡고 싶은 의미, 지키고 싶은 가치, 스스로 만들어가고 싶은 삶의 리듬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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