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다도 좋아하지만 산에 가기를 즐긴다. 나이 들어가면서 더욱 그렇다. 두 발로 걸어가는 모든 길이 그 사람의 진짜 인생이 된다고 생각한다. 마음은 새벽에 집을 나서서 산 정상에서 맞는 아침해를 꿈꾸지만 아직 그 정도로 부지런하지는 않아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다가 11시가 다 되어서야 집을 나선다. 그래도 오를 수 있는 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걷기를 즐긴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철학적으로 걷기는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걸을 때 우리는 목적지뿐 아니라 주변의 풍경, 소리, 냄새,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마주하게 된다.
이제 막 가을로 들어선 계절의 냄새, 이를테면 하나 둘 떨어지는 낙엽에서 나는 그윽하고 여유로운 갈색 빛깔의 냄새 같은 것 말이다. 자전거를 탄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이 경쾌하게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가벼운 러닝복 차림의 사람들이 아직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안정적으로 달린다. 벤치에는 나이 여든을 넘은 동네 할머니들이 빨랫줄 위의 참새처럼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젊을 적 이야기에 한창 빠져있다.
나는 어떻게 나이 들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나이 들어서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더 늦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소중한 사람인데 더 자주 보아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걷다 보면 깊고 잔잔한 생각이 바위 아래 샘물처럼 졸졸졸 흐른다.
그래서 걷기는 이동인 동시에 사유가 되는 것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민이 있을 때 산바카라을 하며 생각을 정리한다. 나도 복잡한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싶을 때 걷는다. 걷기는 심리적으로는 마음을 정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일정한 리듬의 걸음은 긴장을 완화하고, 복잡한 감정을 차분하게 바라보게 돕는다. 그래서 걷기는 일종의 자기 대화라고도 할 수 있다.
독바위역 1번 출구로 나와 세계문화박물관 방향으로 걷는다. 삼삼 오오 배낭을 가볍게 짊어지고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직은 따가운 햇살이 볼에 느껴지지만 발걸음 경쾌하다. 불광중학교 옆길을 따라 북한산둘레길 8구간 구름정원길을 걷는다.
"여기가 서울 맞아? 저기 배추 좀 봐봐."
통통하게 포기가 앉고 있는 한 아름은 족히 될 것 같은 커다란 배추를 보며 나는 발걸음을 멈춘다. 평상을 만들어 놓고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껄껄 거리는 목소리가 영락없이 어느 농촌의 마을길을 걷는 기분이다. 맞은편에서는 테니스 코트가 있어 라켓에 공 튕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우리 부부는 주로 잔잔한 둘레길을 걷는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들과 마을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숲길에 들어선다. 계속 둘레길을 걷자니 무언가 웅장한 자연과 만나는 부분이 덜하고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방울이 그립다.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이고 느낌이다. 옆지기는 여전히 잔잔하게 걷는 걸 좋아한다.
향로봉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왔을 때 나는 발을 멈추고 말한다.
"왼쪽으로 가면 둘레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향로봉이야. 향로봉 한 번 올라가 볼까?"
나는 부부끼리 연인끼리 혹은 혼자 산행을 하는 분들이 거의 향로봉을 향하고 있음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 우리도 올라가 보자."
"괜찮겠어?"
옆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향로봉을 향한다.
급경사길이 바로 이어졌다. 헉헉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한쪽으로 비켜서서 기다린다.
"감사합니다."
내려가시는 분들은 고마움을 표한다.
"네~수고하십시오."
간단하게 건네는 인사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순간이다.
한발 한 발 비탈면을 딛고 나아가니 조금씩 고도가 높아진다. 이미 땀은 비 오듯이 쏟아지고 얼굴은 터질 것만 같다. 오르막길은 힘들다. 누구의 노랫말처럼 웃음기 사라진다. 산을 오르는 것이 인생길로 상징되는 것이 아마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삶의 관점에서 보면 걷기는 성장의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 뛰는 것이 성취를 향한 속도라면, 걷는 것은 나만의 속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높은 곳을 향하여 갈 때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내가 끝까지 오르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다. '한 발 한 발 걷는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그 말은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나아간다는 말이고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간 사람은 반드시 자신만의 봉우리에 우뚝 선다고 나는 믿고 있다.
두어 번 쉬고 가파른 경사면을 타고 오르니 눈부신 파란 하늘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능선 위에 도달한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바위틈에 뿌리를 뻗고 당당하게 자라는 소나무의 위용도 장관이다.
향로봉 방향 능선에 가까워지면 바위가 점점 많아진다. 소나무 뿌리가 암반을 움켜쥐고 있고,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들이 길의 성격을 바꿔 놓는다. 나무에 묶인 리본과 국립공원 표지판, 그리고 갈림길마다 세워진 이정표가 길잡이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걷는다는 느낌보다 산과 대화하며 오른다는 느낌이 짙어진다.
마침내 향로봉 아래에 이르면 북한산 특유의 웅장한 암릉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향로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봉이 하늘로 솟아 있고, 주변으로 비봉과 승가봉, 문수봉 능선이 파도처럼 이어진다. 정상 부근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더 이상 서울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아니라, 산과 도시가 서로 품고 있는 거대한 지도를 보는 경험에 가깝다.
참으로 신기한 지형을 가진 서울이라는 도시. 서울에 왔던 외국인들 사이에서 서울에 오면 꼭 컵라면과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싸서 등산을 하고 정상에서 풍경을 보며 컵라면을 먹어보라는 이야기가 유명하단다. 그들의 입장에선 도심에서 바로 산으로 이어지는 신기한 도시이고 바위며 소나무들이 매우 이국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오랫동안 서울과 수도권에 살고 있는 나에게도 놀랍게 느껴진다.
우리는 요즘 한창 맛있는 시나노골드 사과와 삶은 달걀, 참치김밥을 도시락으로 준비했다. 땀 흘려 걷고 난 뒷산에서 먹는 음식은 그 무엇이든 꿀맛이다. 소나무 향기와 멋진 풍광이 생각과 감정을 활짝 열어준다.
진관사 쪽으로 내려가 차를 한 잔 하고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조금 더 편안한 독바위역 쪽으로 회귀하기로 하기로 한다.
향로봉 옆 암릉을 내려선다.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고, 눈앞에는 비봉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뒤돌아보면 향로봉은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화강암 기둥처럼 서 있다. 불광동 방향 이정표를 따라 능선길에 들어선다. 거칠었던 암반은 점차 흙길로 바뀌고, 숲은 걸음을 감싸 안는다. 참나무와 신갈나무가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낙엽은 발밑에서 조용한 소리를 낸다.
갈림길마다 나타나는 불광중학교 이정표는 도시를 향한 방향을 알려준다. 숲 사이로 은평구의 풍경이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나무 뒤로 숨는다. 산과 도시가 서로를 바라보며 공존하는 순간이다. 고도를 낮출수록 숲은 더욱 깊고 부드러워진다. 계곡을 스치는 바람은 흙냄새와 나무 향을 실어 나른다. 지금은 아니지만 비 온 뒤라면 맑은 물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우고, 이끼 낀 바위는 세월의 흔적을 품은 채 길가에 머문다.
한동안 이어지던 산길은 점차 완만해진다. 햇살은 나뭇가지 사이로 넓게 스며들고, 숲 너머로 학교 건물과 운동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의 시간 속을 걷던 발걸음이 다시 일상의 시간과 만나는 지점이다. 불광중학교 이정표를 지나면 흙길은 포장길로 이어진다. 새소리는 멀어지고 사람들의 생활 소리가 가까워진다. 골목과 주택가가 하나둘 나타나며 산은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면 향로봉이 숲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방금 지나온 능선은 햇빛 속에 고요히 누워 있고, 산은 아무 말 없이 하루의 여정을 품고 서 있다. 하산은 끝났지만 숲의 바람과 바위의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무사히 잘 내려왔네. 멋진 하루였다."
"저녁 먹고 들어갈까?"
우리 부부는 대화를 하다가 일단 막내 아르바이트 끝나는 시간이라 전화를 해본다.
"엄마, 내가 삼겹살로 수육해 놓을게."
"우리 애기가 수육을 할 줄 알아?"
"유튜브 보고해 볼게."
우리는 다음 기회에 '산이 좋은 사람들'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돌아오니 그 작은 아이가 언제 커서 산을 타고 온 엄마 아빠가 먹을 수육을 만들었을까 싶다. 신기하게도 맛이 훌륭하다.
"나도 지리산 천왕봉 한 번 오르고 싶어. 어릴 적에 실패했던 거 다시 해보고 싶어."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지리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화대종주 하고 싶다"
이야기는 이어지고 이어진다.
나는 또 한 발 한 벌 걸어 지리산 천왕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잔잔하고 맑게 마음을 정돈하면서 부지런히 걸어 몸의 근육을 키워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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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에도 고요하고 성실하게 쓰고 꾸준히 성장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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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05:00 발행 [시 쓰는 새벽 1] 완결
화 05:00 발행 [달콤한 창작의 공간 3]
수, 금 05:00 발행 [아이는 어떻게 배우는가]
토 05:00 발행 [기타, 와플 그리고 파란 캠핑카]
일 05:00 발행 [나는 오늘 걷는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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