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바카라은 하나의 문장으로 기억되리오
분명히 읽은 바카라인데, 누군가 내용을 물으면 머뭇거릴 때가 있다. 좋았다는 느낌은 남아 있는데 무엇이 좋았는지 설명하려면 말이 흐려진다. 줄거리도, 인물의 이름도, 읽는 동안 고개를 끄덕였던 대목도 또렷하지 않다. 바카라장을 넘기는 데 들인 시간은 적지 않은데 정작 내 안에 남은 것은 얼마 없는 것 같아 아쉬웠다. 이럴 거면 나는 무엇하러 읽었을까.
처음부터 읽는 일 자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모르는 것이 많다는 생각에 바카라을 펼친 날들이 있었다. 조금 더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고 싶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겪는 어려움을 먼저 겪은 누군가가 쓸 만한 답을 남겨 두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흔들리지 않는지, 가까운 사람과 잘 지내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바카라 속 어딘가에는 내가 아직 찾지 못한 길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읽고도 잘 기억하지 못하면 제대로 읽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말할 수 있어야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한 권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은 잠시였고, 곧 읽지 않은 바카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읽는 일에도 성적표를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바카라을 펼칠 때만큼은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서도 나는 얼마나 나아졌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바카라을 읽는 동안 내가 오래 머무는 곳은 꼭 유용한 지식이나 명쾌한 해답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남에게 설명하기 어려웠던 마음을 누군가 정확하게 적어 놓은 대목,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의 사소한 행동, 읽고 나서도 선뜻 동의할 수 없어 자꾸 돌아보게 되는 문장이었다. 이야기가 궁금해 서둘러 넘기던 손이 그 앞에서는 멈췄다. 바카라의 다음 장보다 내 지난날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꽤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런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익숙한 설명이 어딘가 어긋났다. 신중했다고 기억한 선택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을 수도 있고, 상대를 위해 했다고 믿었던 말에 내 욕심이 들어 있었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오랫동안 부끄러워했던 일이 그때의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뒤늦게 이해하기도 했다.
그럴 때 바카라은 나를 꾸짖지도,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사정을 보여주었다. 나와 닮은 인물에게는 유난히 엄격해지고, 나와 전혀 다른 인물에게는 뜻밖에 너그러워지는 나를 보면서, 내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도 돌아보게 되었다. 남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내 마음이 더 궁금해졌다.
물론 바카라 한 권을 읽었다고 삶이 눈에 띄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타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도 가까운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고, 결과에 매달리지 말자는 대목에 공감하고도 기대만큼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했다. 읽는 나와 살아가는 나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때로는 그 거리가 민망해서, 좋은 말을 아는 일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내 말이 옳다고 끝냈을 자리에서 마음 한구석이 조금 불편해졌다. 쉽게 단정한 사람에게도 내가 모르는 시간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내뱉은 말을 거두지는 못해도, 뒤늦게 다시 생각할 수는 있었다. 바카라에서 읽은 말이 언제나 필요한 순간에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는 일이 지나간 뒤, 혼자 남았을 때 찾아왔다. 늦게 도착한 문장 때문에 다음번에는 조금 다르게 말해 보고 싶어졌다.
그제야 읽은 바카라을 기억한다는 것이 줄거리를 빠짐없이 설명하는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은 흐릿해졌어도 어떤 장면 앞에서 멈췄던 마음은 남아 있었다. 오래전에 읽은 문장이 지금 겪는 일을 통해 뒤늦게 이해되기도 했다. 읽을 당시에는 별다른 뜻 없이 지나친 말이 몇 해 뒤에는 견디기 어려운 하루를 설명해 주었다. 바카라을 덮은 뒤에도 읽는 일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런 순간에 알았다.
그래서 이제 작은 기록을 시작하려 한다. 이름은 ‘내 삶에 들어온 한 문장’이다. 여러 바카라을 읽고, 한 권에서 한 문장을 골라 그 바카라을 기억해 보려 한다. 가장 유명한 문장이나 작가의 생각을 가장 잘 요약한 문장을 고르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무심히 지나쳤을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는 그냥 지나갈 수 없었던 문장. 그 앞에서 왜 읽기를 멈췄는지 적어 보고 싶다.
한 문장으로 바카라 한 권을 다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남기려는 것은 바카라의 축소판이 아니라, 그 바카라을 읽던 나의 흔적이다. 같은 바카라을 읽어도 사람마다 밑줄을 긋는 곳이 다르듯, 내가 고른 문장에는 그때의 관심과 망설임, 말하지 못한 바람이 묻어 있을 것이다. 어떤 문장에 오래 머물렀는지를 살피다 보면,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이 절실한지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문장만 옮겨 적고 끝내지는 않으려 한다. 그 말이 바카라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지나 나왔는지 살피고, 내 삶의 어느 부분과 맞닿았는지 적어 볼 생각이다. 나를 위로해 준 문장뿐 아니라 불편하게 만든 문장도 남기고 싶다.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말 앞에서는 서둘러 그럴듯한 뜻을 붙이지 않고, 무엇이 어려운지부터 써 보려 한다. 잘 정리된 감상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더 솔직한 기록일 때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같은 바카라을 다시 읽으면 다른 문장을 고를지도 모른다. 한때 나를 일으켜 세웠던 말이 더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눈여겨보지 않았던 구절 앞에서 오래 멈출 수도 있다. 그때는 예전의 기록을 고치기보다 나란히 두고 읽고 싶다. 그 시절에는 왜 그 말이 필요했는지,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바카라은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그사이 어떤 날들을 지나왔는지.
나는 여전히 읽고도 많은 것을 잊을 것이다. 어떤 바카라은 끝까지 읽기 어려울 테고, 어떤 바카라에서는 오래도록 한 문장을 고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읽는 동안 잠시 내 확신을 내려놓았던 일,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을 알아보았던 일까지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시간을 아까워하지는 않으려 한다.
나는 왜 읽는가. 아직 살아 보지 못한 삶이 궁금하고, 살아 놓고도 이해하지 못한 내 날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어서, 남의 이야기를 빌려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렇게 읽은 바카라에서 한 문장씩 남겨 보려 한다.
훗날 그 문장을 다시 펼쳤을 때,
바카라의 내용보다 먼저 그 말을 필요로 했던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