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와 시선이 겹치는 날들
해가 지는 속도가 달라짐을 하루가 멀지 않게 느낀다. 어제는 아직 밝았던 시간이 오늘은 조금 더 어두워져 있다. 그 차이를 느끼는 순간, 입에서 먼저 나오는 말이 있다. '슬슬 더 써야겠다.' 대단한 다짐은 아니다. 그냥 하루가 짧게 느껴져서, 뭔가 남겨 두고 싶어지는 마음. 그 마음이 바카라상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한다.
여름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더위는 사람을 참 무기력하게 만든다. "오늘은 그냥 쉬자”는 말이 너무 쉽게, 너무 정당하게 나온다. 겨울의 추위도 비슷한 힘을 가진다. 몸을 잔뜩 움츠리게 만들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미리 꺾어 놓는다. 그런데 가을의 공기는 그 정도로 세지 않다. 살짝 서늘할 뿐이다. 그 서늘함이 핑계를 만든다. 완전하지 않은 핑계. 사람을 멈추게 하지는 않으면서, 그렇다고 마음껏 바깥으로 달리게 하지도 않는. 적당하다.
그 적당함이 묘하게 짙은 힘을 발휘한다. '해가 점점 빨리 지니까 얼른 이 정도는 해야지.', '시원한 때니 이때 글을 써야지!' 어느새 손이 키보드 위에 올라가 있다. 그렇게 빈 시간을 메우는 일은 문장을 쌓는 행위로 이어진다. 강력한 핑계는 포기를 부르고, 약한 핑계는 산만을 부른다. 가을의 핑계는 이렇게나 사람을 살살, 그러나 꾸준히 글 앞으로 데려오는 느낌이랄까.
시선도 변한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전보다 덜하다. 봄과 여름에는 서로의 옷차림이나 작은 변화를 무의식적으로 훑어보게 되고, 겨울에는 두꺼운 옷 사이로 드러나는 취향을 비교하게 된다. 가을은 그 중간 어디쯤. 관심의 방향은 서서히 바깥에서 안으로 바뀌는 시간들. 그래서일까 서로를 향한 시선이 느슨해진다. 굳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굳이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시선이 느슨해지면 질문이 생긴다. 나는 지금 무엇에 마음이 머물러 있지? 오늘 유난히 남은 감정은 뭐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작은 장면 하나, 잠깐 멈칫했던 순간 하나. 가을의 공기 속에서는 그 작은 것들이 더 오래 남는 느낌이다. 습기가 빠져나가면서 소리와 감정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생각의 윤곽도 조금 더 또렷해진다. 또렷해진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나의 문장 속에서 춤을 춰댄다.
나의 글은 거창한 영감이 찾아와서 쓰는 것이 아닐 때가 더 많다. 적당하게 밀어 주는 핑계와, 적당히 느슨한 시선이 우연히 겹치는 날, 그냥 앉아 있다가 손이 먼저 움직인다.
내게 가을은, 그 우연이 자주 일어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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