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야, 바쁘니? 너도 이제 슬슬 팀이든 네 이력이든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지 않겠니?”
문구열 과장이 옆에 와서 말했다. 내 사수다. 생산부의 사수가 변규선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문구열 과장은 신사다. 처진 눈에 처진 눈썹, 늘어진 입과 코, 한쪽에 늘 까치집이 있는 직모 머리.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말도 느리다. 충청도 산골 사람처럼 느린데 고향은 강원도다. 대신 논리적으로 말은 잘한다. 바카라을 많이 읽은 사람 같다.
그는 그룹의 일 중독자로 유명하다. 하루 열두 시간 근무가 기본이다. 말도 일도 빠르지 않은 대신 시간을 갈아 넣는 사람이다. 부사수인 나를 챙길 겨를이 없어서, 나는 현진영과 김팔봉에게 눈칫밥을 먹으며 일을 배웠다. 그런 그가 한바탕 바쁜 일이 끝나자 옆에 있는 내가 눈에 띈 모양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결과 그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 같다.
그는 테스트 장비의 비법서 같은 빨간 바카라을 여러 권 건네고, 차근차근 가르치기 시작했다. 꼼수와 지름길을 알려주는 현진영, 김팔봉과 달리 그의 교육은 정통파였다. 그리고 사람을 조금 열받게 한다. 질문을 던지고, 트집을 잡고, 조금 알려준다.
테스트 시간 단축, TTR의 목적이 뭐냐는 질문에 테스트 시간을 줄여 생산율을 높이는 것이라고 답하자, 그는 한 가지 틀렸다고 했다. 수율의 손실 없이 시간을 줄이면서 품질을 유지하고 생산율을 극대화하는 것. 수율과 품질이 같은 말 아니냐는 내 물음에는, 생산부에서 온 사람의 부끄러운 질문이라고 했다. 수율은 생산 대비 양품률이고, 품질은 테스트를 두 번 세 번 해도 같은 양품률이 유지되는 것이다. 방향은 같지만 성질이 다르다. 성질나는 대화법이다. 그래도 신기한 게, 폭언은 절대 없다.
그는 코드 260번째 줄을 짚었다. 1볼트에서 3볼트까지 전압별로 네 번 테스트하는 부분. 시간을 줄이는 법은 가장 낮은 전압과 가장 높은 전압만 남기고 중간을 건너뛰는 것이다. 로봇의 신경이라면 중간 전압도 봐야 안심이겠지만, 양산 과정에서는 모두 뺀다. 언젠가 누군가 불량을 받으면 그제야 다시 추가될 것이다. 다행히 중간 전압만 불량 나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다.
1038번째 줄, 충전 항목에서는 답을 못 했다. 신경칩을 충전하는 동작에는 싱글과 멀티가 있다. 하나씩 하느냐, 한 번에 여럿을 하느냐다. 동시에 하면 빠르지만, 아주 특수한 경우 불량을 놓칠 수 있다. 사람도 여러 일을 동시에 하면 하나를 놓친다. 신경칩도 다를 게 없다. 인간이 만든 것이라 그런지, 희한하게 인간을 닮았다. 그래서 개발 단계에서는 싱글로 돌린다. 그러나 양산으로 넘어오면 1분 1초가 급하다. 이 회사는 뼛속부터 제조회사다. 품질 회사가 아니다. 언제나 생산성이 우위에 있고, 그것이 어디서든 제조팀이 막강한 권력을 쥐는 이유다.
신경칩의 구조도 배웠다. 점, 선, 면의 3차원이다. 점이 셀, 셀을 묶은 선이 페이지, 페이지를 묶으면 블록, 블록을 크게 묶은 면이 플레인이다. 최신 제품 하나에 블록이 4천 개가 넘고, 블록당 페이지가 백 개, 페이지 하나에 셀이 수백억 개다. 사람의 뇌를 흉내 낸 물건답게, 엄청나게 세분된 구조다.
등급 얘기도 들었다. 한우처럼, 신경칩에도 등급이 있다. 고등급은 대부분의 고객에게 가고, 저등급은 싼값에 팔린다. 등급이 낮다고 무조건 나쁜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용량이 적을 뿐이다. 반응이 조금 둔해도 되는 로봇에는 모조리 저등급을 넣는다. 그렇게 원가를 아낀다. 값싼 로봇의 굼뜬 손끝에는 이런 사정이 들어 있다.
문구열 과장의 대인 마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오후 늦게까지 나를 붙잡고 지식을 부었고, 막상 업무는 저녁을 먹고 시작했다. 퇴근은 밤 열 시가 기본이 되었다.
그의 교육에서 제일 힘든 것은 질문이었다. 코드의 쓸데없는 라인을 최적화하라면서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주면 복사 붙여넣기만 하는 복돌이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냥 복돌이로 살고 싶다. 보너스라며 ECC도 배웠다. 오류 수정 코드. 셀이 수백억 개인데 그 전부가 무결할 수는 없으니, 컨트롤러나 알고리즘으로 수십 개의 불량 셀을 바로잡는 기술이다. 고객마다 허용하는 불량 셀 개수가 다르다. 하나모리와 소노다인이 서로 다른 무결성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로봇의 신경에도 저마다의 관용이 계약되어 있다.
배우는 과정은 기분이 나빴지만, 폭언 없이 배우는 것이고 결론적으로 도움은 됐다. 그의 화법은 말년 병장의 말장난 같았다. 설명을 즐기기 위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이 틀리기를 바란다. 컴파일이 왜 안 되는지 스스로 찾으라기에 첫 줄부터 해석하겠다고 하자, 장님 코끼리 만지듯 엄한 곳을 만진다고 했다. 버그 메시지를 보고 역으로 해석해야지, 처음부터 어느 세월에 보냐고. 회사는 너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뭘 해 볼까요, 물으면 그것을 나한테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라고. 할 것은 네가 찾아야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조직 제일의 목표는 TTR이다. 필요 없는 테스트 항목을 제거하는 일. 문제는 여기서부터 내 철학과 어긋난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온도와 습도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듯, 제품도 환경에 따라 성능이 달라진다. 그 모든 것이 고려되어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당장은 필요 없어 보여도 언젠가는 필요할 수 있다. 모든 것은 결국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참다못해 물었다. TTR을 꼭 해야 하냐고. 시간을 억지로 줄이는 것 같다고. 필요 없는 항목은 없지 않겠냐고. 그는 제품팀의 코드가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내가 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한 뒤 이렇게 정리했다. 내가 좀 눈치는 챘지만 너는 좀 4차원인 것 같아. 사람을 갑자기 4차원 소시오패스로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항목을 뺄 생각만 하지 말고 효율화도 생각하라는 그에게, 과장님도 항목 빼는 것부터 하지 않느냐고 끝까지 답하자 그는 말이 뱅뱅 돌아 피곤하다며 커피나 한잔하자고 했다. 논리적으로 끝까지 대답하면 갑자기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는 종이컵과 커피믹스를 챙겨 휴게실로 올라갔다. 2층이 소란스러워 4층까지 걸어 올라간 좁은 휴게실에서, 그는 낡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퇴근 후에 뭘 하느냐고 물었다.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쓴다고 하자 의외라며, 무슨 바카라을 읽느냐고 했다. 고전이 된 <별을 캐는 사람>을 얘기했다. 그는 별을 어떻게 캐냐고, 그게 말이 되냐고 했고, 나는 그런 바카라이 아니라 스스로 소중한 보물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라고 설명하다가, 말을 뱅뱅 돌린다는 지적을 또 들었다.
역공으로 그가 읽은 바카라을 물었다. 소설은 역시 무협이라고 했다. 패왕도라는 소설을 아냐기에 전혀 모른다고 하자, 모르면 모르는 거지 전혀 모르는 건 또 뭐냐고 했다. 대체 누구의 대답이 긴지 모르겠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던 주인공이 한 집단에 들어가 전공을 세우는 이야기라는데, 목란 이야기 같다고 하자 맥을 잘 못 짚는다며 패왕도는 남자의 무협이라 목란 같은 여자의 무협과는 틀리다고 했다. 틀리지가 아니라 다르지라고 고쳐 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쓸데없는 얘기로 십 분이나 쉬었다며 자리를 정리했다. 그는 나와 말하면 답답한 모양이었다. 내가 더 답답하다는 사실을 그는 모를 것이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박상군 과장과 현진영, 강정혜가 모여 속닥이고 있었다. 박상군 과장의 화면에는 TTR 비법을 백과사전처럼 정리한 자료가 열려 있었다. 대부분 문구열 과장이 개발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배포하면 애들이 생각을 안 하게 된다는 문 과장의 지적에, 박상군 과장이 답했다. 쓸데없는 것에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공식을 만들어 쉽게 하고 더 효율적인 걸 찾아야죠.
“상군아, 세상에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은 없어.”
문구열 과장이 말했다. 나와 얘기할 때와 태도가 딴판이었다. 내가 주장했던 말을 그가 하고 있었다. 일 중독자 문구열 과장. 참으로 이중적인 사람이다. 그와 계속 함께할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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