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삼국지] 대한민국 영토전쟁, 달라진 전장의 룰

서울에서 부산·대구·대전·광주까지 전국 백화점 격전지 분석과 승부의 법칙

by광화문덕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한낮에는 아직 햇살이 따뜻하지만, 해가 기울면 제법 차가워진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든다. 길가의 은행나무에는 노란빛이 번지고, 바람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마른 잎들이 보도블록 위를 굴러간다.


도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하루를 살아간다. 사람들은 출근하고, 점심을 먹고, 약속 장소를 향해 걷는다. 쇼윈도에는 가을옷이 걸리고, 백화점의 정문은 오늘도 어김없이 열린다.


얼마 전 읽은 기사 하나가 나를 멈춰 세웠다.


롯데백화점 건대스타시티점
2028년 10월 영업 종료 예정.


"건대점이 문을 닫는다고?"


조금 의외였다.


내가 기억하는 건대입구역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지하철 2호선과 7호선이 교차하고, 건국대학교 학생들과 젊은 온라인 게임인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거리다. 저녁이면 음식점마다 불이 켜지고, 달궈진 불판 위에서 고기 익는 냄새가 흘러나온다. 골목마다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인다. 그런 곳의 백화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거리를 오가는 사람의 숫자와 백화점의 매출은 다른 이야기다. 건대스타시티점의 연간 거래액은 2022년 1,553억원에서 2025년 1,419억원으로 줄었다. 3년 사이 약 8.6% 감소했다. 전국 백화점 순위에서도 하위권에 머물렀다. 숫자만 보면 점포를 정리하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만 다른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롯데가 건대라는 자리를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걸까?'


문득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백화점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다. 어느 지역에 백화점을 세우느냐는 마치 바둑판 위에 돌을 놓는 것과 같다. 당장 큰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중요한 길목을 먼저 차지하면 경쟁사의 진출을 견제할 수 있다.


당시에는 그저 흥미로운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건대점의 폐점 소식을 접하고 나니 그 말이 새삼 다르게 들렸다.


바둑판 위에 놓인 돌 하나는 처음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주변에 다른 돌들이 놓이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서로 연결되어 세력을 넓히고, 상대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때로는 멀리 떨어진 돌과 호응해 판 전체의 형세를 바꿔놓는다. 그렇게 하나둘 놓인 돌들은 어느새 커다란 영토를 만들어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문득 삼국지가 떠올랐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요충지를 선점하고,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성을 쌓고, 때로는 성 하나를 빼앗기 위해 수많은 병사를 동원해 치열한 공성전을 벌이던 제후들.


그들의 영토 싸움이 롯데와 신세계, 현대백화점이 지난 수십 년간 벌여온 입지 경쟁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누군가는 더 많은 성을 확보하려 했고, 누군가는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에 힘을 집중했다. 또 누군가는 상대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곳에 새로운 성을 쌓으며 세력을 키웠다.


백화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아닐까.


물론 백화점들이 실제로 바둑을 두듯 점포를 늘리고 줄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지역에 진출할지, 어떤 점포를 유지하고 철수할지 결정하는 데는 입지와 투자비, 임대차계약과 수익성 등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하지만 이미 놓인 돌들을 하나의 바둑판 위에 펼쳐놓는다면 어떨까. 각 기업이 어느 지역을 선점했고, 어떤 길목을 지키고 있으며, 어디에서 경쟁사의 진출을 견제하고 있는지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건대점의 철수 소식도 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롯데는 단순히 장사가 잘되지 않는 점포 하나를 정리하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국 곳곳에 놓아둔 돌들을 다시 살피며, 앞으로 지켜야 할 자리와 내려놓아야 할 자리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답이 궁금해졌다.


대한민국 백화점 삼국지

먼저 전황부터 살펴보자


전쟁의 흐름을 읽으려면 먼저 지도를 펼쳐야 한다.


어느 제후가 얼마나 많은 성을 차지하고 있는지, 중요한 길목은 누가 지키고 있는지, 어디에서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비로소 전체의 판세가 보이기 때문이다.


백화점의 영토 전쟁도 마찬가지다. 서울과 경기도, 인천을 넘어 전국 곳곳에 들어선 백화점들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만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지역의 소비가 모이는 중심지다. 동시에 각 기업이 오랜 시간 자본과 역량을 쏟아 구축한 전략적 거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전장에서 롯데와 신세계, 현대백화점은 각각 어떤 영토를 확보하고 있을까.

누가 더 많은 성을 차지하고 있을까. 누가 더 강력한 요새를 갖고 있을까. 그리고 어느 지역에서 세 기업의 세력이 맞부딪치고 있을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롯데가 건대라는 돌을 거두려는 지금, 대한민국 백화점의 판세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실제로 어느 지역에서 백화점 소비가 늘고 있는지, 롯데와 신세계, 현대백화점은 어디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전국 시도별 백화점 판매액 자료를 찾아봤다.


다행히 교보증권 리서치센터 장민지 선임연구원이 정리한 자료가 있었다. 국가데이터처 통계를 바탕으로 지역별 판매액과 전년 동기 대비 증감률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였다.


복잡한 숫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표를 한참 들여다봤다. 그러다 숫자들 사이에서 조금씩 흥미로운 흐름이 읽히기 시작했다.


2025년 서울의 백화점 판매액은 약 19조4,790억원이었다. 경기도는 약 7조5,300억원, 부산은 약 4조4,280억원이었다. 서울과 경기도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성장률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2025년 4분기 서울의 백화점 판매액은 전년 동기 대비 8.4% 증가했고, 대전은 9.3%, 경상남도는 7.5% 증가했다. 반면 2024년에는 여러 지역에서 판매액이 감소했다.


같은 백화점 산업이라도 지역에 따라, 시기에 따라 소비의 흐름은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의 병력 배치와 보급 상황을 살피는 기분이었다. 어디에 병력이 집중돼 있는지, 어느 전선에서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지, 어디에서 후퇴의 조짐이 나타나는지.


다만 지역별 판매액의 증감만으로 특정 기업의 승패를 판단할 수는 없다. 이 숫자에는 해당 지역의 여러 백화점이 함께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을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원자료를 시각적으로 다시 정리해 봤다.

데이터 출처: 교보증권 리서치센터 장민지 선임연구원(2026.04.22)
데이터 출처: 교보증권 리서치센터 장민지 선임연구원(2026.04.22)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어느 지역에서 소비가 활발한지는 알게 됐다. 하지만 정작 그 소비를 누가 차지하고 있는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선을 기업으로 돌렸다.


롯데와 신세계, 현대백화점의 수도권·비수도권 매출 비중을 비교하고, 2025년 연간 거래액 1조원을 넘어선 점포들을 살펴봤다.


여기서 예상과 다른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교보증권의 2026년 4월 분석에 따르면, 3사의 수도권 매출 비중은 현대백화점 약 86%, 롯데쇼핑 약 66%, 신세계 약 55%로 추정됐다.


현대의 수도권 집중도가 가장 높았고, 신세계는 상대적으로 지방의 비중이 컸다. 전국 곳곳에 가장 많은 백화점을 확보한 롯데가 반드시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부산과 대구, 대전 등 주요 지방 도시에서는 오히려 신세계가 압도적인 단일 점포를 구축하고 있었다.


2025년 거래액 1조원 이상을 기록한 점포들을 살펴보니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해졌다.


신세계는 강남과 본점뿐 아니라 부산 센텀시티, 대구, 대전까지 여러 지역에 초대형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현대는 판교와 더현대 서울, 압구정본점과 무역센터점이 중심이었고, 롯데는 잠실과 본점, 부산본점이 1조원 이상 점포에 이름을 올렸다.


'성을 많이 가진 것과 강력한 성을 가진 것은 다른 문제구나.'


나는 그제야 세 기업의 전략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데이터 출처: 교보증권 리서치센터 장민지 선임연구원(2026.04.22)


이제 숫자 대신 지리를 살펴볼 차례였다.


서울에서 시작해 경기도와 인천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부산과 대구, 대전과 광주, 울산과 창원까지 내려갔다.


도시마다 세 기업이 확보한 거점들을 하나씩 짚어봤다.


어느 곳에서는 두 기업의 백화점이 가까운 거리에서 고객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또 어느 곳에서는 거대한 백화점 하나가 주변 도시의 고객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넓은 땅에 수많은 성을 확보한 제후가 있는가 하면, 중요한 요충지에 거대한 성채를 구축하고 천하의 형세를 뒤흔드는 제후도 있다.


삼국지와 닮았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건대점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백화점의 영토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천하삼분지계

성을 넓게 쌓은 롯데, 대마를 키운 신세계, 두터움을 만든 현대


삼국지에서 영토는 단순한 땅이 아니다. 성 하나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 지역의 곡식과 세금, 사람과 도로를 확보한다는 뜻이다. 군대가 아무리 강해도 보급로가 끊기면 오래 버틸 수 없다. 반대로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면 상대는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백화점의 세계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다만 오늘날의 성벽은 돌로 쌓이지 않는다. 교통망과 브랜드, 식품관과 명품 매장, 주차장과 문화시설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굳이 그곳을 찾아올 이유가 곧 성벽의 높이가 된다.


롯데는 오랫동안 넓은 지역에 많은 점포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서울에는 명동 본점과 잠실이라는 거대한 거점이 있다. 청량리와 노원, 미아와 건대, 영등포와 관악에도 점포를 두었다. 경기도로 나가면 평촌과 구리, 일산과 부천, 안산과 동탄이 이어진다. 인천에도 핵심 점포가 있다. 전국으로 눈을 돌리면 부산과 대구, 대전과 광주, 울산과 전주, 창원에도 롯데의 간판이 보인다. 롯데는 곳곳에 성을 쌓았다. 고객들이 거주하고 생활하는 지역 가까이에 백화점을 세워 넓은 소비 접점을 확보해 온 것이다.


신세계는 조금 달라 보인다. 모든 지역에 많은 성을 짓기보다 중요한 곳에 강력한 성채를 구축하는 쪽에 가깝다. 서울 강남, 부산 센텀시티, 대구 동대구역, 대전 유성. 이곳의 대형 점포들은 주변의 여러 생활권에서 고객을 끌어들인다. 마치 성 하나가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모습이다.


현대는 압구정과 무역센터, 판교와 여의도에 강력한 거점을 만들었다. 비교적 적은 수의 핵심 상권에서 구매력 높은 고객과 새로운 소비문화를 확보하는 모습이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롯데는 집을 넓게 짓고, 신세계는 강력한 대마를 키우며, 현대는 두터운 세력을 구축해 온 셈이다.


물론 이 구분이 세 기업의 공식적인 경영전략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국 점포망이 만들어낸 결과를 이해하기에는 꽤 흥미로운 비유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실제 전선에서는 누가 앞서고 있을까.


서울의 강남에서 시작해 보자.


서울의 강남大戰

신세계의 강남과 롯데의 잠실


서울 강남권은 전국 백화점 경쟁의 핵심 전선이다.

삼국지에 비유한다면 천하의 부와 인재가 모여드는 중원과도 같은 곳이다.


서초와 반포에는 신세계 강남점이, 압구정에는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삼성동에는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이 자리한다. 조금 더 동쪽으로 가면 잠실이 나오고 그곳에는 롯데백화점 잠실점과 월드몰, 에비뉴엘이 하나의 거대한 상업권을 형성하고 있다. 서로 다른 성채들이 넓은 전선에서 대치하는 모습이다.


그 가운데 신세계 강남점의 성적은 압도적이다. 2025년 연간 거래액 3조6,717억원. 전국 1위다. 이 성채가 강한 이유는 단순히 명품 브랜드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아래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어 지하철과 버스가 연결되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오간다. 삼국지에 비유하면 강력한 보급로와 시장을 동시에 확보한 셈이다.


신세계는 그 길목에 명품과 식품, 문화 콘텐츠를 모아놓았다. 사람들은 단순히 지나가지 않는다. 멈추고, 구경하고, 먹고, 소비한다. 그렇게 신세계 강남점은 전국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성채가 됐다.


그런데 동쪽 잠실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가 있다. 롯데 잠실점이다. 2025년 연간 거래액은 약 3조3,010억원.

전국 2위다. 잠실에는 신세계 강남점과 다른 강점이 있다. 백화점뿐 아니라 월드몰과 에비뉴엘, 호텔과 관광시설이 연결돼 있다. 석촌호수와 롯데월드타워를 중심으로 거대한 도시형 쇼핑·문화 공간이 형성돼 있다. 롯데월드타워가 잠실 하늘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깃발 같다. 멀리서도 보이는 성채다.


두 점포의 경쟁은 단순한 매출 순위 다툼이 아니다.


누가 더 많은 광역 고객을 끌어들일 것인가.
누가 더 많은 명품 브랜드를 확보하고, 고객에게 그곳을 방문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줄 것인가.
전국 최초의 연간 거래액 4조원 백화점이라는 고지를 누가 먼저 차지할 것인가.


그런데 이 전쟁에서 현대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다. 현대백화점은 압구정본점과 무역센터점을 통해 고급 소비시장에 강력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전국 최대 규모의 점포 하나에 모든 힘을 쏟기보다 서로 다른 고객층과 상권을 기반으로 차별화를 시도한다.


결국 서울의 프리미엄 소비시장은 하나의 기업이 독식하는 전쟁터가 아니다. 신세계의 강남성, 롯데의 잠실성, 현대의 압구정성과 삼성동 성채가 각자의 고객 이동 경로를 확보하고 있다.


그 성벽이 모두 높은 만큼 쉽게 끝날 전쟁은 아니다.


서울의 명동 공성戰

관광객이라는 새로운 원군


서울 도심에는 또 다른 전선이 있다. 명동이다. 롯데백화점 본점과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풍경은 강남과 조금 다르다. 여행 가방을 끄는 외국인들이 보이고, 거리에는 다양한 언어가 뒤섞인다. 화장품과 패션 상품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이 골목을 오가고, 저녁이면 음식점마다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명동은 지역 주민의 구매력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권이다. 관광객이라는 외부의 소비 수요가 중요하다.


롯데 본점은 명동의 핵심 상권과 연결된 대형 거점이다. 신세계 본점은 역사적인 건축물과 명품 콘텐츠를 중심으로 프리미엄 고객을 공략한다.


2025년 거래액에서는 롯데 본점이 신세계 본점보다 앞섰다. 그러나 신세계도 쉽게 물러날 상대가 아니다. 신세계는 본점의 공간을 고급화하고 차별화된 브랜드를 강화하면서 도심의 프리미엄 소비를 공략하고 있다.


삼국지에서는 원군이 도착하면 전세가 달라졌다. 명동에서는 관광객이 원군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하면 두 백화점 모두 성장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명동의 전쟁은 단순히 상대방의 고객을 빼앗는 싸움이 아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소비를 누가 더 많이 흡수하느냐의 경쟁이기도 하다.


롯데는 본점과 에비뉴엘, 영플라자를 연결하는 '롯데타운 명동'을 통해 도심 거점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때는 백화점 건물 하나가 성이었다.


이제는 주변 상업시설까지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성곽을 만드는 시대가 됐다.


서울의 영등포·여의도 삼파전

성문 앞에 줄을 세운 현대


서울 서남권으로 시선을 옮기면 또 다른 전쟁이 펼쳐진다. 영등포역에는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이 있다. 그 가까이에 신세계백화점 타임스퀘어점이 자리하고 있다.


철도와 지하철, 버스가 모이는 곳인 영등포는 오랫동안 서울 서남권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이곳에서 롯데와 신세계는 서로 경쟁한다. 2025년 점포별 거래액에서는 신세계 타임스퀘어점이 롯데 영등포점을 앞섰다.


그런데 이 전선에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 여의도의 더현대 서울이다. 2021년 문을 연 더현대 서울은 기존 백화점의 문법을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사람들이 반드시 무엇을 사기 위해 방문할 필요는 없다. 공간을 구경하고, 새로운 브랜드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할 수 있다. 실내 정원과 넓은 개방형 공간, 다양한 팝업스토어와 문화 콘텐츠가 새로운 방문 이유가 된다.


전략은 적중했다. 2025년 더현대 서울은 전국 백화점 거래액 4위에 오른다. 서울 서남권의 고객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고객까지 찾아오는 광역 거점이 된 것이다.


영등포에서 롯데와 신세계가 기존 교통 거점의 수요를 놓고 경쟁하는 동안, 현대는 여의도에 새로운 소비 목적지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조금 다른 형태의 공성전이다. 성벽을 높게 쌓아 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성문 앞으로 찾아오게 만드는 전쟁이다.


굳이 군대를 보내 성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그 성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다면, 그것 자체가 강력한 경쟁력이 된다.


어쩌면 백화점의 전쟁은 이미 이 지점에서 달라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입지의 전쟁에서 경험의 전쟁으로.


서울 동북 전선

롯데는 왜 건대성을 버리려는가


이제 다시 건대로 돌아와 보자.


서울 동북권에는 롯데의 돌이 많다. 노원점과 청량리점, 미아점과 건대스타시티점이 각기 다른 생활권에 자리하고 있다. 현대는 미아점과 천호점 등으로 일부 생활권에서 경쟁한다.


롯데는 오랫동안 서울 동북권에 촘촘한 점포망을 구축해 왔다. 노원은 서울 동북부의 주거 수요를 흡수하는 거점이다. 청량리는 동대문과 중랑, 경기 동북부로 이어지는 교통 결절점에 자리한다. 미아는 강북과 성북의 생활권을 바라보고, 건대는 광진과 성동의 소비 수요에 접근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롯데가 곳곳에 성을 세운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전황이 달라지고 있다.


롯데 미아점은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건대스타시티점은 2028년 10월 영업 종료가 예정돼 있다. 과거에는 지역별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했던 거점들이 이제는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것이다.


왜일까.


건대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잠실로 가는 데는 네 정거장이다. 그곳에는 전국 2위의 초대형 백화점이 있다. 명품과 프리미엄 브랜드, 대형 쇼핑몰과 문화시설을 한꺼번에 이용하려는 고객이라면 잠실을 선택할 이유가 충분하다. 건대점의 입지는 그대로인데 주변에 더 강력한 선택지가 생긴 것이다.


서쪽에서는 성수동이 성장했다. 건대입구역에서 성수역은 한 정거장 거리다. 낡은 공장 건물이 카페로 바뀌고, 창고였던 공간에 브랜드의 팝업스토어가 들어섰다.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을 찾아 성수의 골목으로 향한다.


물론 건대에서 소비하던 사람들이 모두 잠실이나 성수로 이동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택지가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건대는 여전히 대학가 상권으로서 활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반드시 백화점의 매출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매출은 해마다 줄었다.


여기에 2028년 임대차계약 만료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전쟁에 비유하면 건대성을 계속 지키기 위해 새로운 비용을 투입할 것인지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다.


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위에 롯데라는 깃발을 계속 꽂아두는 것이 경제적으로 타당한지 다시 계산해야 한다.


'그렇다면 롯데는 건대에서 병력을 거두고 잠실에 집중하려는 것일까'


이 해석은 흥미롭지만 아직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건대점 고객이 실제로 얼마나 잠실로 이동할지, 경쟁사나 온라인으로 얼마나 이탈할지는 별도의 고객 데이터가 있어야 판단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전국 점포망의 재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어쩌면 롯데는 작은 성을 유지하는 대신 더 큰 성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면 건대 철수는 단순한 패배가 아닐 수 있다. 전선을 줄이고 핵심 거점을 강화하려는 후퇴 전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퇴각 이후다.


병력이 철수한 땅이 반드시 자기 영토로 남는 것은 아니니까.


인천大戰

신세계의 성을 차지한 롯데


수도권에서 가장 극적인 백화점 영토전쟁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인천을 떠올릴 것 같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한 기업이 운영하던 백화점의 자리가 경쟁 기업의 점포로 바뀌었다. 인천종합터미널 이야기다.


2012년 롯데는 인천광역시와 터미널 부지 인수를 위한 투자약정을 체결했다. 2013년에는 약 9,000억원에 매수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이미 신세계백화점 인천점이 영업하고 있었다. 신세계로서는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자리였을 것이다. 결국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긴 소송 끝에 2017년 11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매각 계약을 무효로 볼 수 없다는 취지였다.


2019년에는 신세계가 떠난 자리에 롯데백화점 인천점이 들어섰다.


이 사건은 현대판 공성전을 떠올리게 한다. 성벽을 무너뜨린 것도 아니고, 군대를 동원한 것도 아니다. 부동산 소유권과 임대차 관계, 법원의 판단이라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성의 깃발이 바뀌었다. 한 기업이 오랫동안 확보하고 있던 핵심 상권의 거점이 경쟁 기업으로 넘어간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인천·부천 지역의 시장 경쟁 제한 가능성을 우려해 조건부 승인을 내렸을 정도로 중요한 거래였다.


현재 주요 백화점 3사의 인천 점포망만 놓고 보면 롯데가 우위에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세계는 송도에 신규 점포를 추진하고 있다. 인천종합터미널이 이미 형성된 소비의 길목이라면 송도는 새로운 주거지역과 국제업무지구를 배경으로 성장해 온 도시다.


롯데가 기존 성을 차지했다면 신세계는 새로운 땅에 성을 세우려는 모습이다.


한쪽에서 성을 빼앗겼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곳에 더 큰 성을 세울 수도 있다.


그래서 인천의 다음 전황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판교 공성戰

신흥 강자가 경기 남부를 흔들다


경기도 남부로 내려가면 현대백화점 판교점이 등장한다. 2015년 8월 문을 연 이곳은 2025년 12월 연매출 2조원을 돌파했다. 개점 10년 4개월 만이다. 당시 국내 백화점 가운데 최단기간 기록이었다.


현대는 서울이나 부산이 아닌 곳에서도 연매출 2조원 백화점이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사실 판교는 오래된 전통 상권이 아니다. 첨단산업 기업들이 모여들고, 새로운 업무시설과 주거단지가 들어서면서 성장한 도시다.


현대는 그 변화의 중심에 강력한 거점을 구축했다. 반면 롯데백화점 분당점은 2026년 3월 문을 닫았다. 물론 롯데 분당점의 폐점을 현대 판교점 하나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점포의 노후화와 상권 변화, 수익성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점포의 대비는 선명하다.


한쪽은 지역의 소비를 광역적으로 끌어들이는 초대형 점포로 성장했다. 다른 한쪽은 오랫동안 지켜온 지역 점포를 정리했다. 경기 남부의 프리미엄 백화점 소비시장에서 현대 판교점의 강력한 경쟁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다고 경기 남부 전체가 현대의 영토인 것은 아니다. 롯데는 평촌과 동탄에 거점을 갖고 있고, 수원에서는 기존 백화점을 타임빌라스 수원이라는 복합쇼핑시설로 전환했다. 수원역 주변에는 AK플라자도 있고, 광교에는 갤러리아라는 경쟁자도 있다.


경기 남부의 전선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현대가 판교라는 중요한 성을 차지했지만 롯데와 다른 유통기업들도 주변 도시에서 각자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이 때문ㅇ 판교에서의 승리가 곧 경기 남부 전체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대 판교점의 성공은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성을 여러 개 세우는 것이 유리할까 아니면 압도적으로 강력한 성 하나를 만드는 것이 유리할까.


그 답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산이 떠오른다.


부산大戰

롯데의 여러 성과 신세계의 거대한 요새


부산의 바다는 서울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해운대의 넓은 바다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바닷바람이 높은 건물 사이를 지나간다. 그리고 그 해운대권의 센텀시티에는 거대한 백화점이 서 있다. 신세계 센텀시티점이다.


부산은 오랫동안 롯데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다. 서면에는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이 있고, 광복점과 동래점, 센텀시티점도 부산 곳곳에 자리해 왔다. 롯데는 여러 생활권에 점포를 배치해 고객과 접점을 유지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2009년 신세계가 센텀시티에 거대한 백화점을 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백화점으로 주목받았던 곳이다. 대형 쇼핑 공간에 문화와 여가시설을 결합했다. 단순히 백화점 하나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부산과 경남의 고객들이 일부러 찾아올 이유를 만들었다.


결과는 숫자로 나타났다. 신세계 센텀시티점의 2025년 연간 거래액은 약 2조2,642억원이었다. 전국 3위다. 롯데 부산본점도 1조원대 거래액을 올리는 강력한 거점이지만, 단일 점포 거래액에서는 신세계 센텀시티점이 앞섰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발생한다. 롯데는 부산의 여러 지역에 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신세계는 센텀시티라는 거대한 성 하나로 광역 고객을 끌어들였다. 마치 여러 성을 가진 제후가 하나의 거대한 요새와 대치하는 모습이다. 이는 부산의 고객들이 어디까지 이동할 의사가 있는지, 무엇을 경험하기 위해 시간을 쓰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사례다.


집 근처 백화점보다 먼 곳의 센텀시티점을 선택하는 고객이 있다면 그 이유는 단순히 거리에 있지 않다. 그곳에 가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롯데가 부산에서 완전히 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면을 중심으로 한 부산본점의 경쟁력은 여전히 중요하고, 다른 점포들도 각자의 지역 수요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광역 고객을 끌어들이는 대표적인 초대형 점포라는 기준에서 보면 신세계 센텀시티점이 강력한 우위를 갖고 있다.


부산의 전쟁은 많은 성을 갖는 것과 강한 성을 갖는 것의 차이를 보여준다.


대구 공성戰

동성로의 오래된 성채를 흔든 동대구역의 신세계


대구의 전선은 더욱 극적이다.


대구에서 오랫동안 번화가를 상징했던 곳은 동성로였다. 주말이면 쇼핑을 나온 사람들로 거리가 붐볐고, 약속이 있는 사람들은 동성로의 익숙한 건물 앞에서 서로를 기다렸다. 옷을 사고,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식사를 하는 일상의 중심에 그 거리가 있었다.


그곳에는 대구를 대표하는 향토 백화점인 대구백화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친근하게 '대백'이라고 불렀다.


'대백 앞에서 만나.'


한때는 그 말만으로도 약속 장소를 설명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대구백화점은 단순한 쇼핑 공간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대구 시민들의 일상과 함께해 온 지역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롯데와 현대백화점이 각자의 거점을 구축하며 소비시장의 주도권을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전장의 흐름을 바꾸는 새로운 성채가 등장했다. 2016년 12월 문을 연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이다.


위치는 동성로가 아니었다. 동대구역이었다. KTX와 SRT가 정차하고, 고속·시외버스가 연결되는 광역 교통의 중심지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역사 밖으로 나오고, 버스를 갈아타려는 사람들이 이동한다. 대구 시민은 물론 경북의 여러 지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모이는 곳이다.


신세계는 바로 그 길목에 거대한 성채를 세웠다. 단순히 백화점을 하나 더 만든 것이 아니었다. 교통시설과 대형 쇼핑 공간을 결합하고, 명품 브랜드와 식품·문화시설을 집약했다. 고객들이 일부러 찾아와 오랜 시간을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구의 전통적인 소비 중심지가 동성로였다면, 신세계는 동대구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광역 소비 거점을 구축한 셈이다.


그 전략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2025년 신세계 대구점의 연간 거래액은 약 1조6,600억원대에 달했다. 반면 더현대 대구는 약 5,900억원대였고, 롯데 대구점과 상인점은 각각 그보다 작은 규모의 거래액을 기록했다. 단일 점포의 거래액을 기준으로 보면 대구에서 신세계의 우위는 뚜렷했다.


그렇다고 동대구역에 백화점이 들어섰다는 사실만으로 기존 도심 상권이 쇠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온라인 쇼핑의 성장과 소비문화의 변화, 점포별 경쟁력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세계 대구점의 등장이 대구의 백화점 경쟁 구도를 크게 바꿔놓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나는 이 장면에서 삼국지의 공성전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도시의 중심을 지켜온 성채들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시장이 형성돼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그런데 새로운 교통 요충지에 거대한 성이 세워졌다. 사방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확보한 그 성에는 먼 지역의 상인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전장의 무게중심이 조금씩 달라졌다. 기존의 성을 직접 무너뜨리지 않고도 새로운 길목을 차지함으로써 판세를 바꿔놓은 것이다.


어쩌면 신세계가 대구에서 보여준 전략도 이와 닮아 있지 않을까.


상대의 성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보다 사람들이 앞으로 더 많이 모일 수 있는 길목에 더 강력한 성을 세우는 것. 기존의 상권을 빼앗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전략이다.


물론 오래된 성채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현대백화점은 기존 대구점을 '더현대 대구'로 재단장하며 공간과 콘텐츠를 차별화했다. 롯데 역시 대구점과 상인점에서 각자의 생활권 고객을 붙잡기 위한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대구백화점이었다. 동성로에서 오랜 시간 지역 소비문화를 이끌어왔던 대구백화점 본점은 2021년 7월 영업을 중단했다. 도시의 중심에서 수십 년 동안 간판을 밝혀왔던 향토 백화점이 문을 닫은 것이다.


물론 대구백화점 본점의 영업 중단을 신세계의 진출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전국적인 유통 대기업들이 거대한 성채를 구축해 가는 동안, 그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 오래된 백화점의 불빛은 꺼졌다는 사실이 묘하게 씁쓸하게 다가온다.


성은 더 커지고, 쇼핑 공간은 더욱 화려해졌다. 대구 시민들은 더 많은 브랜드와 서비스를 누리게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 '대백'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던 지역의 시간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승리한 기업의 성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힘을 잃어가는 지역의 오래된 성채를 바라보는 마음은 조금 복잡하다.


대구의 전쟁은 그래서 단순한 백화점 매출 경쟁으로만 읽히지 않았다. 어느 기업이 더 많은 고객을 확보했느냐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도시의 소비 중심이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새로운 성채가 들어서 도시의 소비가 성장할 때, 그 도시에서 오랫동안 자라온 기업들도 함께 성장할 수는 없는 것일까.


대구의 사례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좋은 입지는 반드시 과거에 가장 번화했던 곳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새로운 교통의 길목이 소비의 중심으로 떠오를 때, 오랫동안 도시를 지켜온 상권과 기업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


삼국지에서 중요한 것은 성의 숫자만이 아니었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길목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천하의 형세가 달라졌다.


대구에서 신세계가 차지한 것은 단순히 동대구역 앞의 넓은 땅이 아니었다. 대구와 경북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모이는 새로운 소비의 길목이었다.


대전·광주

새로운 성채가 들어서고, 옛 제후들이 사라지다


대전에는 세 개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신세계 Art & Science. 갤러리아 타임월드. 롯데백화점 대전점.


이 도시의 경쟁은 조금 더 복잡하다. 롯데와 신세계뿐 아니라 갤러리아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문을 연 대전신세계 Art & Science는 백화점에 과학과 문화, 체험 요소를 결합했다.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시설이 아니라 가족 단위 방문객과 광역 소비자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공간을 만들었다. 2025년에는 연간 거래액 1조원을 돌파했다.


반면 갤러리아 타임월드는 오랫동안 대전의 프리미엄 소비를 대표해 온 거점이다. 롯데백화점 대전점도 기존 생활권에서 경쟁하고 있다.


신세계가 새로운 초대형 성채를 세우면서 기존 강자들을 압박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전선을 살펴보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세이백화점이다. 1996년 문을 연 세이백화점은 한때 대전을 대표하는 향토 백화점이었다. 지역 주민들이 옷을 사고, 가족과 외식을 하고, 주말을 보내던 곳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첫 데이트 장소였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찾아갔던 추억의 장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2024년 5월, 세이백화점은 영업을 종료했다. 28년 동안 대전의 한 자리를 지켜왔던 지역 백화점의 간판이 내려간 것이다. 물론 세이백화점이 문을 닫은 이유를 신세계의 진출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온라인 쇼핑의 성장과 소비 방식의 변화, 경영 여건 악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묘하게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한쪽에서는 새로운 초대형 백화점이 연간 거래액 1조원을 돌파하며 세력을 넓혀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과 함께했던 향토 백화점이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삼국지로 치면 새로운 강자가 거대한 성채를 세우는 동안, 그 땅을 오랫동안 지켜온 지역의 제후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그런데 광주에서도 비슷한 역사가 있다. 지금 광주의 백화점 경쟁을 이야기하면 신세계 광주점과 롯데 광주점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오래전 광주의 중심 상권을 지키던 백화점은 따로 있었다. 화니백화점. 가든백화점. 송원백화점.


1977년 문을 연 화니백화점은 광주 최초의 백화점이었다. 충장로의 대표적인 상업시설로 성장하며 한때 호남 지역의 소비문화를 이끌었다. 1986년에는 가든백화점이, 1995년에는 송원백화점이 등장했다. 광주의 소비시장을 지역에서 성장한 기업들이 이끌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95년 신세계가 광주종합버스터미널 인근에 진출하면서 경쟁 구도는 달라졌다. 여기에 외환위기와 지역기업들의 무리한 사업 확장, 경영난이 겹쳤다. 화니백화점은 1999년 폐업했다. 가든백화점도 2010년 문을 닫았다. 송원백화점은 외부 유통기업의 위탁경영을 거치며 향토 백화점으로서의 독자적인 운영 체제를 잃었다. 그렇게 광주의 오래된 성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광주에서는 또 다른 공성전이 예고되고 있다.


신세계는 기존 거점의 경쟁력을 강화하려 하고, 현대는 '더현대 광주'라는 새로운 복합쇼핑시설을 추진하고 있고, 롯데 역시 기존 광주점과 지역 내 유통망을 갖추고 있다.


현재 광주에서는 신세계 광주점이 롯데 광주점보다 거래액 규모에서 앞선다. 하지만 앞으로 새로운 대형 거점이 등장한다면 호남권의 소비 흐름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지역 밖으로 향하는 소비다.


언론에 보도된 수치만 놓고 보면, 광주·전남 거주 신세계 고객의 타지역 점포 소비액은 2024년 1,685억원에 달한다. 광주에서의 경쟁 상대가 반드시 광주 안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광주 소비자가 서울 강남이나 부산 센텀시티에서 물건을 산다면, 그곳의 백화점도 광주 상권의 경쟁자가 된다.


이런 까닭에 현대의 광주 진출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새로운 백화점을 세워 기존 경쟁사의 고객을 끌어오는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 향하던 소비를 지역 안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움직임을 살펴보다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지역의 소비를 붙잡기 위해 새로운 성채들이 올라가고 있지만, 정작 그 지역에서 시작한 기업들의 이름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대전의 세이백화점이 그랬고, 광주의 화니백화점과 가든백화점도 그랬다. 새로운 성은 더 크고 화려해졌지만, 오래된 성은 점점 기억 속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물론 소비자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기고, 지역에는 새로운 투자와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지역에서 시작해 성장한 기업들이 그 변화 속에서 함께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질문을 남긴다.

지역의 소비시장이 성장한다는 것과 지역의 기업이 성장한다는 것은 과연 같은 의미일까.


그 질문은 잠시 마음속에 남겨두기로 했다. 전국의 백화점 지도를 조금 더 살펴본 뒤, 다시 돌아와 살펴보겠다.


울산·창원·전주

작은 성을 지키는 또 다른 전쟁


모든 백화점 전쟁이 초대형 점포에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울산에는 롯데백화점과 현대백화점이 오랫동안 지역 고객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부산이나 대구처럼 하나의 초대형 신규 점포가 시장을 압도하는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기존 도심의 소비 수요를 어떻게 유지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어떤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느냐가 중요하다.


경남 창원과 마산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롯데백화점 마산점은 2024년 영업을 종료했다. 한때 지역의 소비 거점이었던 성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인근에는 신세계백화점 마산점이 있고, 창원에는 롯데백화점 창원점이 있다.


그렇다면 롯데 마산점이 떠난 고객들은 모두 신세계 마산점으로 이동했을까. 언론보도만 놓고 보면, 그렇지 않은 듯하다. 롯데 마산점 폐점 이후 신세계 마산점이 얻은 추가적인 매출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일부 고가 소비는 부산의 대형 백화점으로 향한 것으로 분석된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지역의 성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서 바로 옆의 성이 그 고객을 모두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객은 생각보다 먼 곳까지 이동할 수 있다. 전북 전주에서는 롯데백화점 전주점이 주요 백화점 거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충북 청주에는 현대백화점 충청점이 있고, 천안·아산에는 신세계백화점 천안아산점이 있다.


이들 점포도 각자의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전국 최상위 매출 점포와 같은 규모로 경쟁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마다 인구와 소득, 교통망과 소비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백화점의 영토는 행정구역처럼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부산의 백화점은 경남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고, 대구의 백화점은 경북 고객을 흡수할 수 있다. 판교의 백화점도 성남시 주민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고객들은 행정구역의 경계보다 자신이 원하는 상품과 경험을 따라 이동한다.


이제는 성 하나가 얼마나 넓은 지역의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사석작전

롯데는 왜 자신의 성을 허무는가


전국 지도를 다시 펼쳐놓았다. 처음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롯데는 전국 주요 도시에 넓은 점포망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산과 대구, 대전 등 주요 지방 대도시에서는 신세계가 강력한 단일 점포를 구축하고 있었다. 현대는 수도권의 핵심 상권에 역량이 집중된 구조였다.



교보증권이 추정한 수도권 매출 비중을 다시 떠올려 봤다. 현대 약 86%. 롯데 약 66%. 신세계 약 55%.


숫자는 세 기업의 차이를 보여준다. 전국에 많은 점포를 갖고 있는 것과 전국에서 강한 소비 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같지 않다.


더욱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2025년 전국 65개 백화점의 전체 거래액은 약 40조4,402억원이었다. 그 가운데 상위 10개 점포가 차지한 비중은 49.8%였다. 2021년에는 약 42%였다. 불과 4년 사이 상위 점포로 소비가 더욱 집중된 것이다.


마치 수많은 작은 성보다 몇 개의 거대한 성채가 전쟁의 흐름을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롯데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전국 곳곳에 확보한 성을 모두 지킬 것인가 아니면 일부 성을 거두고 강력한 거점에 자본을 집중할 것인가.


최근 롯데의 움직임은 후자에 가까워 보인다. 2026년 3월 분당점이 문을 닫았다. 미아점은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건대스타시티점도 2028년 10월 영업 종료가 예정돼 있다. 반면 잠실점 리뉴얼에는 약 8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명동에서는 롯데타운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수원에서는 기존 백화점 중심 공간을 타임빌라스 수원이라는 복합쇼핑시설로 바꿨다.


단순히 점포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성을 지키고, 어떤 성을 포기하며, 어떤 성의 기능을 바꿀지 다시 계산하는 모습이다.


바둑에는 '사석(捨石)'이라는 말이 있다. 일부 돌을 포기하는 대신 더 큰 실리를 얻는 수다. 처음 바둑을 배우는 사람은 돌 하나를 잃는 것도 아까워한다. 하지만 고수는 모든 돌을 끝까지 지키려 하지 않는다. 때로는 작은 돌을 버려 더 큰 집을 확보한다.


롯데의 선택도 그런 사석작전을 떠올리게 한다.

건대라는 돌을 거두는 대신 잠실이라는 대마의 힘을 키우는 것일까. 분당이라는 성을 정리하는 대신 다른 거점에 투자하려는 것일까.


물론 이것이 롯데가 공식적으로 밝힌 모든 점포 정리의 목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개별 점포의 임대 조건과 수익성, 시설 투자 필요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다만 전체 점포망을 바라보면 롯데가 과거의 촘촘한 포석을 다시 정리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전쟁에서 퇴각이 언제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을 버린 뒤에도 그 지역의 고객을 계속 붙잡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롯데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건대점을 없애더라도 광진구 고객들이 롯데 잠실점으로 향한다면 롯데는 그 지역의 소비 수요를 계속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고객들이 다른 백화점이나 온라인으로 이동한다면 롯데는 건대라는 점포뿐 아니라 고객과의 접점 일부도 잃을 수 있다.


건대점 철수가 성공적인 사석작전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 답은 롯데가 돌을 거둔 다음에야 드러날 것이다.


성을 차지하는 전쟁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전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자료를 뒤적이고, 숫자를 들여다보고, 오래된 백화점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낮 동안 따스했던 가을 햇살은 자취를 감췄고, 창문 너머로 스치는 바람에는 제법 차가운 기운이 묻어난다.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처음 이 글을 쓰게 만들었던 건대입구의 풍경을 다시 떠올린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골목을 지나가고, 음식점 창문 너머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학생들은 웃으며 거리를 걷고, 누군가는 지하철 막차 시간을 확인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롯데백화점 건대스타시티점도 아직은 그 자리에 있다. 그 안에서는 오늘도 누군가 물건을 고르고, 직원들이 고객을 맞이하고, 매장 문이 열리고 닫힐 것이다.


2028년 10월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롯데의 간판이 내려간다면 건대의 풍경도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백화점 하나가 사라진다고 도시가 멈추지는 않는다. 여전히 지하철은 오가고, 건국대학교 학생들은 수업을 들으러 가고, 사람들은 골목에서 저녁을 먹을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익숙했던 장소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첫 월급으로 정장을 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백화점 정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을 것이다. 누군가는 부모님 선물을 사려고 매장을 몇 바퀴나 돌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풍경들은 기업의 재무제표에는 남지 않는 기억들이다. 그래서 백화점의 폐점은 단순히 매출이 줄어든 점포 하나를 정리하는 문제로만 보이지 않는다. 기업에는 전략이지만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변화다.


나는 다시 삼국지를 떠올린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성을 빼앗고 빼앗기던 제후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단순히 성벽과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화점의 전쟁도 비슷하지 않을까.


강남에 얼마나 큰 백화점을 지었느냐보다 사람들이 왜 그곳을 찾아가는지가 중요하다. 부산에 몇 개의 점포를 갖고 있느냐보다 부산과 경남의 고객들이 어디를 목적지로 선택하는지가 중요하다. 건대에 백화점이 남아 있느냐보다 건대의 고객들이 앞으로 어디에서 소비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롯데는 건대라는 돌을 거두더라도 그곳의 고객을 계속 붙잡을 수 있을까.
그 고객들은 잠실로 향할까. 성수동의 골목으로 향할까. 아니면 현대백화점이나 다른 복합쇼핑시설을 찾게 될까. 그것도 아니라면 온라인이라는 전혀 다른 전장으로 이동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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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백화점들이 벌이는 경쟁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과거에는 중요한 길목에 성을 세우는 일이 경쟁력의 출발점이었다. 좋은 입지를 선점하고, 유명 브랜드를 확보하고, 주변 생활권의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고객이 먼 곳에서도 일부러 찾아올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브랜드와 음식, 문화와 경험이 어우러진 공간이어야 한다. 사람들의 시간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건물은 움직이지 않지만 사람은 움직인다. 그 사람이 움직이는 길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거대한 성을 쌓아도 언젠가는 비어버릴 수 있다. 어


쩌면 롯데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20년 동안 지켜온 건대라는 돌을 거두려는 것일까.


창밖으로 가을바람이 지나간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잎 하나가 힘없이 떨어진다. 그 잎이 떨어진다고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다. 겨울이 지나면 나무는 또 다른 잎을 틔울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나무가 같은 봄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백화점의 바둑판도 그렇다. 어떤 성은 더 높아지고, 어떤 성은 허물어지고, 어떤 곳에는 새로운 깃발이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도시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롯데가 건대라는 돌을 거둔 다음에는 누가 그 자리에 새로운 돌을 놓게 될까. 신세계일까. 현대일까. 아니면 더 이상 백화점이 아닐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삼국지에서는 성을 차지한 자가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오늘날 백화점 삼국지에서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움직이는 자가 영토를 얻는다. 그리고 그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잊힌 제후들

지역 백화점의 몰락, 그리고 남겨진 질문


전국 백화점의 지도를 오래 들여다보다 보니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롯데와 신세계, 현대가 차지한 영토만이 아니다. 그들이 거대한 성채를 구축해 가는 동안 지도에서 하나둘 사라진 이름들이다.


앞서 대전의 세이백화점과 광주의 화니백화점, 대구의 대구백화점 이야기를 살펴봤다. 하지만 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청주에는 흥업백화점이 있었고, 부산에는 태화백화점이 있었다. 이들은 한때 지역의 중심 상권을 지키며 그 도시의 소비문화를 이끌었던 기업들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떤 백화점은 문을 닫았고, 어떤 백화점은 다른 기업에 운영권이 넘어갔다. 여전히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향력을 잃어버린 곳도 있다. 이름도, 사라진 이유도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이들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백화점들이 사라진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쇼핑을 하지 않는 걸까?'


물론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옷을 사고, 선물을 고르고,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한다. 다만 소비하는 장소가 달라졌을 뿐이다. 오랫동안 지역의 중심을 지키던 백화점 대신 전국적인 유통기업의 대형 점포를 찾아간다. 더 많은 브랜드가 모여 있고, 더 화려한 공간과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소비자는 더 많은 선택지를 얻게 됐다. 그 자체로 나쁜 변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


'지역의 소비시장은 여전히 살아 있는데, 정작 그 시장에서 성장했던 지역기업들은 왜 하나둘 사라지고 있는 걸까.'


물론 시장의 논리는 냉정하다. 기업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살아남기 어렵다. 더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고객이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새로운 기업의 진입과 경쟁은 소비자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오래된 유통 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지역 백화점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전국적인 유통 대기업을 탓할 수는 없다.


지역기업 역시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고 경쟁력을 높여야 할 바카라임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경쟁력이라는 말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전국적인 유통기업과 지역의 중소 유통기업이 경쟁하는 조건은 처음부터 같지 않다.


대기업은 여러 점포에서 확보한 고객 데이터와 브랜드 협상력을 활용할 수 있다. 자금 조달과 대규모 시설 투자에서도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반면 지역기업은 비교적 제한된 시장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시설을 개선하고, 새로운 브랜드를 유치하며, 변화하는 소비자의 취향을 따라가야 한다.


물론 지역기업이라고 모두 규모가 작거나 자금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국적인 점포망을 갖춘 기업과 비교하면 투자와 협상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한번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그 흐름을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고객이 줄어들면 매출이 감소한다. 매출이 줄어들면 새로운 시설에 투자할 여력이 부족해진다. 투자가 늦어지면 매장은 점점 낡아가고, 새로운 브랜드를 유치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러면 고객의 발걸음은 다시 줄어든다.


반대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고객이 몰리는 대형 백화점에는 유명 브랜드들이 입점하려 한다. 브랜드가 늘어나면 더 많은 고객이 찾아오고, 늘어난 매출은 다시 시설과 콘텐츠에 투자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성공이 또 다른 성공을 만들어내는 구조다.


강한 성은 더욱 강해지고, 약해진 성은 성벽을 보수할 여력마저 잃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백화점 산업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형태의 부익부 빈익빈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익숙한 말 하나가 떠올랐다.


'지역경제 활성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오랫동안 지역경제를 살리겠다고 이야기해 왔다. 기업을 유치하고,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의 소비를 활성화하겠다고 한다.


물론 모두 필요한 일이다. 새로운 백화점이나 복합쇼핑시설이 들어서면 일자리가 생기고, 지역 주민들은 더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다른 도시로 쇼핑을 떠나던 사람들이 지역에 머물면서 소비할 수도 있다. 그렇게 소비가 늘어나고 상권에 활기가 돌면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겼다.


'지역의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과 지역에서 성장한 기업이 잘된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일까?'


가령 어느 도시에 새로운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연간 거래액 1조원을 기록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 도시의 소비시장이 상당한 구매력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자리도 만들어지고, 주변 상권과 협력업체에도 새로운 사업 기회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 백화점의 거래액이 1조원을 넘어섰다고 해서 그 도시에서 시작한 기업들의 경쟁력까지 함께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앞서 살펴본 세이백화점처럼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과 함께 성장해 온 기업이 경쟁에서 밀려 사라질 수도 있다.


한쪽에서는 새로운 백화점의 연매출 1조원 돌파를 축하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수십 년 동안 지역을 지켜온 백화점이 마지막 영업을 마친다.


이는 같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서로 다른 풍경이다.


나는 이 모습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진다. 지역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더 크고 화려한 백화점이 들어서고, 더 많은 사람이 소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새로운 투자가 이루어지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중요한 성과다. 하지만 지역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그 지역에서 시작한 기업들이 사업을 확장하고, 다른 도시로 진출하며, 나아가 전국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하다.


외부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것만큼 지역기업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도록 돕는 일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지역에서 창업한 기업이 지역의 인재를 채용하고, 협력기업들과 함께 성장하며, 그렇게 축적한 경험과 자본을 다시 지역의 새로운 산업에 투자하는 선순환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지역의 소비시장이 커지는 동안 정작 그 지역에서 출발한 기업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시장의 경쟁 논리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야기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지역 백화점들의 몰락은 우리가 추진해 온 지역경제 활성화 정바카라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를 곧바로 정바카라의 실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개별 기업의 경영 판단과 투자 실패, 온라인 쇼핑의 성장, 소비문화의 변화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정바카라의 성과를 평가하려면 구체적인 목표와 투입된 예산, 실제 결과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경쟁에서 뒤처진 모든 기업을 정부가 끝까지 지켜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은 기업을 무조건 보호하는 것이 지역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기업의 진입과 성장을 가로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역기업의 쇠퇴를 시장의 자연스러운 결과로만 받아들이는 것도 어딘가 불편하다.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며 수많은 정바카라과 예산이 투입되는 동안, 정작 그 지역에서 시작한 기업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외부 기업을 유치하고 새로운 소비시설을 만드는 데 기울인 노력만큼, 지역기업이 다른 지역의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였는지 살펴봐야 한다. 지역기업을 무조건 지켜주는 것과 지역기업이 스스로 살아남을 힘을 갖추도록 돕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니.


문득 삼국지에 등장했던 수많은 제후들이 떠오른다. 조조와 유비, 손권이 천하를 나누기 전에도 각 지역에는 저마다의 영토와 군대를 거느린 군웅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오랫동안 지켜온 성이 있었고, 그 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형세가 강력한 세 나라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작은 제후들의 이름은 하나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흔히 승리한 제후의 이름을 기억한다. 누가 어느 성을 차지했고, 얼마나 넓은 영토를 확보했으며, 어떤 전투에서 승리했는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땅을 오랫동안 지켜온 이들의 이름은 쉽게 잊힌다.


백화점 삼국지도 다르지 않다.


롯데와 신세계, 현대가 어느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동안 나는 정작 그곳에 먼저 자리하고 있던 기업들의 이름을 지나쳐 왔다.


세이백화점, 화니백화점, 흥업백화점, 태화백화점. 그리고 대구백화점. 한때는 각자의 도시에서 누구나 알던 이름들이었다. 그 도시의 번화가를 상징했고, 누군가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함께했던 곳들이다.


이제 전국의 주요 소비 거점에는 더 크고 화려한 백화점들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더 많은 브랜드를 만나고, 더 다양한 서비스를 경험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일 수 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다.


새로운 성채는 점점 높아지는데, 그 도시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자라온 성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오래된 성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낡은 성이 무너지고 새로운 성이 들어서는 것이 자연스러운 변화일 수도 있다.


다만 그 지역에서 시작한 기업들이 새로운 경쟁에 적응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까지 시장의 몫으로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역경제 활성화의 진정한 의미는 외부의 거대한 성채를 유치하는 데서 끝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 지역에서 시작한 작은 기업도 자신의 힘으로 더 큰 성을 쌓을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일. 그렇게 성장한 기업이 다시 지역의 인재를 키우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며, 또 다른 기업의 성장을 이끄는 선순환을 만드는 일.


그것이 지역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조건일 것이다.


전국 백화점의 지도를 펼쳐놓고 처음에는 누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지도를 오래 들여다볼수록 승리한 기업들의 거대한 성채보다 그 사이에서 사라져 간 작은 성들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그곳을 지키던 사람들은 떠났지만, 소비는 계속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승리가 반드시 모두의 번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말하는 지역의 성장이란, 결국 누구를 위한 성장일까.


네 번째 제후, 갤러리아

대전의 성을 거두고 강남으로 향하는가


글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문득 한 가지를 빠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화 갤러리아백화점이었다.


대한민국 백화점의 영토 전쟁을 삼국지에 빗대어 풀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롯데와 신세계, 현대라는 세 기업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 백화점의 판세를 이야기하면서 한화그룹의 갤러리아를 빼놓을 수는 없다. 롯데처럼 전국에 수십 개의 점포를 보유한 것도 아니고, 신세계처럼 주요 지방 대도시마다 초대형 백화점을 구축한 것도 아니다. 현대백화점처럼 수도권의 핵심 상권에 역량을 집중한 구조와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화 갤러리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토를 지켜온 또 다른 제후임라는 것이다.


2026년 현재 갤러리아는 서울 압구정 명품관을 비롯해 경기도 광교, 대전 타임월드, 천안 센터시티, 경남 진주 등 전국에 다섯 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점포 수는 많지 않지만, 갤러리아라는 이름이 국내 백화점 시장에서 차지하는 존재감까지 작은 것은 아니다.


특히 압구정 명품관은 국내 프리미엄 소비시장에서 오랫동안 독자적인 위상을 구축해 왔다. 고급 브랜드와 차별화된 상품 구성을 앞세워 구매력 높은 고객층을 확보한 곳이다. 이는 백화점의 경쟁력이 반드시 점포 수나 매장 면적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삼국지에 비유한다면 천하를 삼분한 세 제후만큼 넓은 영토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요충지를 확보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 온 또 다른 제후다.


그런데 이런 갤러리아도 최근 자신의 영토를 다시 계산하는 모습이다. 흥미롭게도 그 변화의 중심에는 대전이 있다.


갤러리아 타임월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양백화점'이라는 이름을 만나게 된다. 1997년 문을 연 동양백화점 타임월드는 2000년 한화유통에 인수됐다. 지역에서 출발한 백화점이 전국적인 유통기업의 점포망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후 갤러리아 타임월드는 오랫동안 대전과 충청권의 프리미엄 소비시장을 대표하는 백화점으로 자리 잡았다. 2021년 거래액은 7,407억원에 달했다. 당시만 해도 대전에서 가장 강력한 백화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바로 그해, 대전의 소비 지도를 뒤흔드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 대전신세계 Art & Science였다. 2021년 문을 연 이 백화점은 과학과 문화, 체험형 콘텐츠를 대형 쇼핑 공간과 결합했다. 단순히 상품을 구매하는 곳을 넘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른 지역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소비의 목적지를 만들어냈다.


결과는 숫자로 나타났다. 2025년 대전신세계 Art & Science의 연간 거래액은 1조원을 돌파했다. 반면 갤러리아 타임월드의 2025년 거래액은 6,032억원이었다. 갤러리아 타임월드는 갤러리아 전체 점포 가운데 압구정 명품관에 이어 두 번째로 매출이 큰 핵심 점포였지만, 대전의 단일 점포 거래액 경쟁에서는 신세계가 앞서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대전의 프리미엄 소비를 이끌어온 갤러리아로서는 달라진 판세를 마주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2026년 9월,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한화갤러리아가 타임월드점의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다.


'연간 거래액이 6,000억원을 넘는 백화점을 매각한다고?'


물론 매출이 많다고 반드시 수익성이 좋은 것은 아니다. 매출 규모와 실제 이익은 다른 문제다. 하지만 타임월드는 전국 다섯 개 갤러리아 점포 가운데 두 번째로 거래액이 큰 곳이다. 충청권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고객 기반과 지역적 상징성도 갖고 있다. 그런 핵심 점포의 매각까지 검토한다는 사실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2026년 10월 현재 매각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한화갤러리아는 타임월드 매각을 포함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은 없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임월드가 문을 닫거나 갤러리아가 대전에서 철수한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핵심 점포의 미래를 재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같은 시기 갤러리아가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고 있는 곳이다. 바로 서울 압구정.


갤러리아 명품관은 한화갤러리아를 대표하는 핵심 점포다. 2025년 거래액은 약 1조1,513억원. 전체 백화점 거래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0%를 넘는다. 한화갤러리아는 이곳의 전면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건물을 재정비하고 영업 공간을 확대해 프리미엄 백화점으로서의 경쟁력을 한층 강화한다는 구상이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예상 투자 규모는 약 9,000억원에 이른다. 대전에서는 핵심 점포의 매각을 검토하고, 서울 압구정에서는 대규모 재건축 투자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앞서 살펴본 롯데의 사석작전이 떠올랐다. 롯데는 건대스타시티점의 영업 종료를 예정하고, 분당점을 정리하는 한편 잠실과 명동 등 핵심 거점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갤러리아 역시 대전 타임월드의 향후 운영 방안을 재검토하면서 압구정 명품관에 대한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물론 두 기업의 경영 환경과 개별 점포의 수익성, 투자 목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점포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하기보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핵심 거점에 자본을 집중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런데 갤러리아의 선택이 더욱 눈길을 끄는 이유가 있다. 한화그룹은 충청권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기업이다. 갤러리아 역시 대전 타임월드와 천안 센터시티를 통해 충청권 소비시장에 중요한 기반을 구축해 왔다.


특히 타임월드는 동양백화점이라는 지역기업의 역사에서 출발한 점포다. 한때 지역의 백화점이었던 곳이 전국적인 유통기업의 핵심 점포로 성장했고, 이제는 그 유통기업조차 해당 점포의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


돌고 돌아 다시 지역의 오래된 성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앞서 대전의 세이백화점 이야기를 했다. 1996년 문을 열어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과 함께했던 향토 백화점은 2024년 5월 영업을 종료했다. 그리고 지금은 전국적인 유통기업인 갤러리아마저 대전의 핵심 점포를 계속 보유할 것인지 다시 계산하고 있다.


물론 세이백화점의 폐점과 타임월드의 매각 검토를 같은 사건으로 볼 수는 없다. 하나는 이미 영업을 종료한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점포의 소유·운영 전략을 재검토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건을 나란히 놓고 보니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지역에서 출발한 백화점은 문을 닫았고, 전국적인 기업이 운영하는 백화점마저 그 지역에서의 미래를 다시 고민하고 있다. 그 사이 새로운 초대형 백화점은 연간 거래액 1조원을 넘어섰다.


소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비는 더욱 강력한 점포로 집중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소비를 어느 기업이 흡수하고 있으며, 새로운 투자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흐름을 살펴보니 지역의 향토 백화점들이 겪었던 어려움도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이들이 단순히 시대에 뒤처졌기 때문에 사라졌다고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물론 경영 판단의 실패와 경쟁력 부족도 있었을 것이다. 기업의 생존은 결국 소비자의 선택과 시장에서의 성과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국적인 유통기업조차 지역 점포의 존속 여부를 다시 계산해야 하는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자본과 투자 여력이 부족했던 향토 백화점들이 살아남기란 얼마나 더 어려웠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지금의 백화점 영토 전쟁이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에는 주요 도시마다 성을 세우고 점포망을 넓혀 고객과의 접점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국에 얼마나 많은 점포를 보유하고 있느냐보다, 어느 점포에 자본을 집중하고 얼마나 강력한 소비 거점으로 키워낼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전국 곳곳에 수많은 성을 쌓는 것보다 고객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강력한 성채 몇 곳을 확보하는 편이 유리해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한가운데 갤러리아도 서 있다. 대전 타임월드의 매각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설령 매각이 이루어지더라도 백화점 영업 자체는 계속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갤러리아가 대전의 성을 버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충청권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해 온 타임월드의 미래를 재검토하면서, 동시에 서울 압구정 명품관에는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는 갤러리아만의 고민도 아니다.


롯데가 건대라는 돌을 거두려는 움직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두 기업의 구체적인 경영 판단과 사정은 다르겠지만, 이미 확보한 모든 점포를 지키기보다 앞으로 더 큰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점을 선택하려는 흐름은 닮아 있었다.


나는 다시 전국 백화점의 지도를 바라봤다.

전국 백화점 지도 인포그래픽.png

서울 압구정의 갤러리아 명품관과 대전의 타임월드. 두 점포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지만, 지금은 한 기업의 전략적 판단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돼 있었다.


한쪽에서는 더 높은 성벽을 쌓기 위한 투자가 준비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오랫동안 지켜온 성의 미래를 다시 계산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 건대점의 폐점 소식을 접했을 때 떠올랐던 바둑판이 다시 생각났다.


바둑에서 모든 돌을 끝까지 지킬 수는 없다. 어느 돌을 살리고 어느 돌을 거둘 것인지 판단하는 일이 때로는 새로운 돌을 놓는 것보다 중요하다.


백화점도 그런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에는 누가 더 많은 성을 차지하느냐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어떤 성을 끝까지 지킬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기업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기업의 재무제표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지역의 소비 흐름을 바꾸고,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온 상권과 사람들의 일상에도 변화를 남긴다.


어쩌면 대한민국 백화점 삼국지의 새로운 판세는 누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자신의 영토를 다시 설계하고 변화하는 소비자의 발걸음을 끝까지 붙잡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2026년 10월 19일.
10여 년 전 기자로 유통업계를 출입하던 시절, 롯데백화점 건대스타시티점이 갖는 전략적 상징성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그저 백화점 하나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으로 넘기기에는 그때의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오래전 기억을 더듬고, 자료를 찾아보고, 전국의 백화점 지도를 펼쳐놓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롯데와 신세계, 현대, 갤러리아의 영토 전쟁을 지나 사라져 간 지역 백화점들의 이야기까지 이르게 됐다. 처음에는 건대라는 돌 하나가 궁금했을 뿐인데, 글을 마칠 무렵에는 그 돌이 놓여 있던 바둑판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된 기자의 호기심이 여전히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 호기심을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광화문덕 씀.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