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30분, 멀어진 나를 다시 곁에 앉히는 시간

아델을 들으며 운전하는 동안 생긴 작은 습관

by김원진

연재를 시작하며


닦고 또 닦아도 중고는 중고입니다. 그런데 매일 손에 쥐는 물건은, 어쩐지 매일 새것 같습니다.


스무 해 넘게 국어를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마흔이 넘어서야, 말로 다 못 한 것들을 글로 한 편씩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도록과 아파트 계단, 장구와 구두와 낡은 찻잔 같은 익숙한 사물을 오래 들여다보면, 거기엔 사물이 아니라 낡아가는 제 얼굴과 곁의 사람들이 비칩니다.


이 연재는 그렇게 사물 하나에서 시작해 삶으로 건너가는 짧은 산문들입니다.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발 떨어져 가만히 바라볼 뿐입니다. 한 편이 짧아 한 호흡에 읽히지만, 부디 그 여운만은 하루를 가면 좋겠습니다.


화요일과 금요일, 사물 하나씩을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출근하러 마당에 나서니 조용히 비가 내린다. 늘 그렇듯 반려견 에디에게 밥과 물을 챙겨주고 차에 올랐다. 구름이 눈을 뿌리던 겨울도 지나고 언제부턴가 텃밭 흙에 습기가 차오르더니, 봄비가 내리는 시절이 왔다. 나는 시동을 걸고 여느 때처럼 아델을 틀었다. 요 며칠 아침마다 듣는 목소리다. 다들 좋다 할 때는 무심히 흘려들었는데, 어쩌다 뒤늦게 푹 빠져버렸다. 움트는 싹을 다독이듯 안온하게 내리는 비가, 지나간 시간을 차분히 되새기는 그 노래와 어딘가 닮았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I'm Yours〉를 부른 제이슨 므라즈라든지, 〈When We Were Young〉의 아델도 하나같이 제 삶을 노래로 만들어 부른다. 아델의 굵고 독특한 음색이야 흉내 낼 수 없는 재능이지만, 사람들이 그 목소리에 머무는 건 음색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음악을 잘 몰라도 누가 제 삶을 얹어 부르는지는 듣는 순간 신기하게 알아챈다. 아델의 노래 역시 먼 훗날 파티장에서 보고 싶은 친구와 연인을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하며 지었다고 한다 아델의 음색에 그리움까지 배어 있으니 듣는 사람의 그리움도 덩달아 깨어난다.


굵은 목소리는 겨울에만 어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봄에 더 깊이 스민다. 추억은 겨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노래는 내게 돌아올 새봄만이 아니라 이미 멀어진 지난 봄들까지 차 안으로 끌어오기 때문이다. 자잘한 빗방울을 쫓으려 와이퍼가 느리게 좌우를 오가고, 젖은 도로 위로 앞차의 미등이 번진다. 복잡하지 않은 한 길을 운전하는 가운데 그 사이를 노래가 천천히 채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이는 모습과 사는 모습이 벌어질수록 사람은 어딘가 위선에 휩싸이고 스스로 걷는 길에서도 자꾸 방향을 잃는다고. 가수든 화가든 교사든 매한가지다. 딛고 선 자리와 내보이는 얼굴이 다르지 않을 때, 비로소 남의 마음이 열리고, 곁에 사람이 모이고, 무엇보다 제 안의 자기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진정성이라는 말은 거창하지만 따지고 보면 복잡하지 않다. 안과 밖의 거리를 좁히는 일 그뿐이다.


슬롯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나 역시 실제보다 조금 더 그럴듯한 얼굴을 한다. 아이들 앞에서 동료들 앞에서, 부모 노릇을 하며, 그렇게 하루를 살다 보면 저녁 무렵의 나는 아침의 나에게서 저만치 멀어져 있곤 한다. 그래서인지 이 아침 출근길의 30분이 내겐 작은 의례와 같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제 삶을 정직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는 동안, 멀어졌던 내가 슬그머니 조수석으로 돌아와 앉는다.


차는 늘 같은 길을 달리고, 노래는 또 같은 부분에서 숨어 있는 나를 끌어낸다.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춘 사이 빗방울 맺힌 창에 얼굴이 어렴풋이 비친다. 신호가 바뀌었다. 오늘도 나와 또 다른 나는 나란히 앉은 채로 같은 길을 다시 달린다.



이 글은 사물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며 '낡아가는 나'를 적는 산문 연재 《닦아도 중고지만, 매일이 새것 같아서》의 한 편입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한 편씩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