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는 우크라이나 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민간인이다.
전쟁은 국가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지도자들은 안보와 평화, 자유와 정의, 국가의 생존과 국제질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뒤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을 결정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젊은이들, 폭격에 가족과 집을 잃는 민간인들,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는 아이들, 그리고 전쟁이 불러온 물가 상승 때문에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세계의 평범한 시민들이다.
이것이 내가 대리전이라는 개념을 좀 더 넓게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전통적인 의미의 대리전은 강대국이 다른 나라의 군대나 무장세력을 지원해 경쟁국과 간접적으로 대결하는 전쟁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직접 싸우느냐에만 있지 않다. 누가 전쟁의 전략적 이익을 추구하고, 누가 그 결정의 인적·경제적 비용을 부담하는가에 있다.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전쟁에서 자국의 군대를 직접 투입하지 않고도 경쟁국의 군사력을 약화할 수 있다면, 그 전쟁은 지원국에 전략적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반면 실제 전투와 파괴의 부담은 전쟁터가 된 나라의 국민에게 집중된다. 미국과 유럽은 무기와 재정, 정보와 군사기술을 지원하지만 정규군을 우크라이나 전선에 직접 투입해 러시아군과 싸우지는 않는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실제 전장에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물론 미국과 유럽도 지원 비용과 경제적 손실, 확전 위험을 부담한다. 그러나 그 비용과 자기 집에서 가족을 잃고 전장에서 신체를 훼손당하는 비용은 같은 종류가 아니다. 강대국은 군사적·경제적 지원의 규모를 조정할 수 있지만, 전장에서 죽거나 다친 우크라이나의 청년은 자신의 생명을 되돌려 받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바로 이 불균형을 보여주는 사례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영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주권국가의 정당한 권리다. 우크라이나 국민을 단순히 미국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이 전쟁은 자국의 생존과 미래가 걸린 전쟁이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은 서방의 지원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과 유럽에 무기와 방공체계, 정보와 통신 지원을 지속적으로 요청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NATO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6년 6월까지 동맹국들은 PURL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조달하는 60억 달러 이상의 군사장비 지원을 약속했다. 이 프로그램은 유럽을 비롯한 동맹국이 비용을 부담하고, 미국이 대량으로 보유한 무기와 탄약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구조다. NATO의 <우크라이나 지원 자료>는 미국의 무기 비축과 생산능력이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미국과 유럽의 지원이 장기간 중단된다면 우크라이나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전쟁을 수행하기는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지원이 끊기면 일주일 만에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진다는 식의 정확한 기간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전쟁의 지속 능력이 외부 지원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불편한 현실이 드러난다.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재정, 정보를 제공하면서 러시아의 군사적 팽창을 저지하고 유럽 안보질서를 지키려 한다. 서방은 자국의 정규군을 러시아와 직접 맞붙게 하지 않고도 우크라이나의 방어를 지원할 수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실제 전장에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이 자국 군인의 직접적인 전투 사상 위험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러시아의 군사력을 약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전쟁은 전략적 의미의 대리전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대리전은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의지 없이 미국의 명령에 따라 싸운다는 뜻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생존을 위한 전쟁이 강대국의 전략적 경쟁과 결합하면서, 우크라이나가 가장 큰 인적 희생을 감당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울경제의 이태규 특파원이 2026년 10월 21일 보도한 ‘제2의 얄타회담’이라는 경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기사는 미국·러시아·중국의 정상들이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채 전쟁의 미래를 논의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종전을 압박하는 가운데, 11월 중국에서 열릴 예정인 APEC 정상회의와 12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가 강대국 간 협상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경제> 영문판 보도(https://en.sedaily.com/international/2026/10/21/ukraine-risks-becoming-casualty-of-a-second-yalta)와 <로이터통신>의 10월 19일 보도(https://www.reuters.com/world/china/kremlin-says-putin-trump-xi-could-hold-three-way-meeting-china-next-month/)에 따르면, 트럼프·푸틴·시진핑의 3자 회담 가능성은 실제로 거론됐지만 구체적인 합의나 의제는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미 세 강대국이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결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협상이 구체화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안보, 국민의 미래를 논의하면서 정작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당사자가 협상 테이블 밖에 놓인다면, 그것은 평화를 위한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주권국가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위험이 있다.
1945년 얄타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소련의 스탈린은 전후 유럽의 질서를 논의했다. 당시 소련군이 이미 동유럽에 진출해 있었고, 그 군사적 현실은 전후 정치질서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자유선거 원칙은 동유럽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고, 소련은 군사적으로 장악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강화했다. 미국 국무부의 <얄타회담 역사 자료>를 보면 외교적 약속과 실제 권력관계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수 있다.
얄타회담을 세 정상이 세계를 완전히 나눠 가진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군사적 이해와 영향권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해당 지역의 국민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충분히 행사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문제는 분명하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같은 위험이 나타날 수 있다. 러시아는 점령한 영토와 군사적 우위를 협상력으로 활용하려 하고, 미국은 전쟁 비용과 러시아와의 관계, 유럽 안보질서에 관한 자국의 계산을 할 것이다. 중국 역시 유럽과 세계의 전략적 질서에서 자국의 이해를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강대국의 이해가 서로 맞아떨어진다고 해서 우크라이나 국민의 동의 없이 영토와 안보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까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이 군사적 지원을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2026년 10월 20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 정바카라을 둘러싸고 패트리엇 요격미사일의 공급 지연과 위성통신 서비스 제한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 측은 일부 지원 지연에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했으며,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협의에서 방공 지원과 정보 공유를 다시 논의했다. <로이터통신>의 10월 20일 보도(https://www.reuters.com/business/media-telecom/zelenskiy-meet-witkoff-trump-praises-russia-rebukes-ukraine-2026-10-20/)는 지원의 지속 여부가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과 협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끝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의 사상자와 파괴를 줄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고 싶다는 사실과 어떤 조건으로든 종전에 동의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르다. 우크라이나가 침략으로 빼앗긴 영토와 장기적인 안보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다시 침략당하지 않을 보장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결정 과정에 참여해 판단해야 할 문제다.
미국과 유럽이 무기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종전 조건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니다. 지원은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생존을 돕기 위한 것이지,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지원국의 전략적 필요에 종속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외교적 성과를 위해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사와 안전을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외교적 실수가 아니라 주권과 자기결정권을 훼손하는 정치적 강압이 될 수 있다.
전쟁을 끝내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종전이 과연 평화라고 불릴 수 있는가? 총성이 일시적으로 멈추더라도 침략의 결과가 사실상 인정되고 재침략의 위험이 그대로 남는다면, 그것은 전쟁의 종결이라기보다 다음 전쟁의 조건을 만들어 놓는 일이 될 수 있다.
한국전쟁은 이런 구조를 이해하는 데 더욱 뼈아픈 역사적 사례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전쟁으로 출발했지만 곧 미국과 중국, 소련이 개입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한국을 지원했고, 중국군은 북한을 지원하며 직접 참전했다. 소련은 물자와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고, 비공개 공중작전에도 관여했다. 한국전쟁을 단순한 대리전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남북한 지도부에도 독자적인 정치적 목표와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전의 강대국 경쟁이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한국군 전사자는 13만 8,418명, 부상자는 45만 742명이며, 유엔군 전사자는 4만 803명, 부상자는 10만 3,460명이다. 남한 민간인 피해 통계에는 사망과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을 합해 99만 968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수치는 당시 정부의 공식 기록이며, 전쟁의 모든 피해를 완벽하게 복원한 확정적인 총계라고 볼 수는 없다. 국가기록원의 <6·25전쟁 피해 통계>는 전쟁의 인적 비용을 보여주는 자료다.
강대국들은 한반도에서 자국의 안보와 이념적 질서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 충돌의 현장은 한국이었고,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고 수많은 주민이 피란을 떠났으며, 전쟁의 결과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도 바로 이 땅의 국민들이었다. 1953년 정전협정은 전투를 중단시켰지만 영구적인 평화조약은 아니었다. 전쟁을 멈추는 것과 전쟁의 위험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다른 과제라는 사실을 한국은 지금까지도 경험하고 있다.
베트남전쟁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직접 군대를 투입했다. 소련과 중국은 북베트남에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는 베트남전쟁과 관련한 미군 사망자 5만 8,220명이 기록되어 있다. 미국 역시 막대한 인적 희생을 치렀다는 뜻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을 단순히 미국과 소련·중국이 베트남을 두고 벌인 대리전이라고만 해석하면 베트남 사람들의 독립과 통일에 대한 의지를 지워버리게 된다. 북베트남은 외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정치적 목표를 추구했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약소국을 강대국의 장기판 위에 놓인 말로만 묘사하는 순간, 그 나라 국민이 왜 싸우는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에 대한 이해도 사라진다.
대리전이라는 개념은 약소국의 주체성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강대국의 전략적 경쟁이 그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삶에 어떤 불균형한 비용을 부과하는지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과 서방의 지원이 전략적 이해를 갖는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전쟁의 또 다른 희생자는 총을 들지 않은 사람들이다. 최근 이란을 둘러싼 전쟁과 중동의 군사적 충돌은 그 사실을 세계의 생활비 문제로 확장하고 있다.
2026년 2월 28일 시작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군사적 충돌은 호르무즈 해협의 해상 운송과 중동 에너지 공급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10월 국제유가와 운송비의 상승은 세계 경제에 불안을 확산시키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 운송비와 제조원가가 상승하고, 그 영향은 식료품과 생활용품 가격으로 번진다. 결국 전쟁을 결정하지 않은 노동자와 자영업자, 저소득 가구가 생활비 상승을 통해 추가 비용을 부담한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더라도 전쟁의 비용으로 자신의 생활 수준을 희생하는 것이다. 전쟁은 국경 안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국제 에너지 시장과 공급망을 통해 다른 나라의 가계와 기업에도 비용을 전가한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전쟁의 경제적 충격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 일부 에너지 기업과 원자재 공급업체는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반면 운송업자와 제조업체, 일반 가계는 비용 증가를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특정 기업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전쟁이 어떤 경제주체에는 수익 기회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생활비 부담이 된다는 분배의 불균형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 지도자들의 동기를 탐욕이라는 한 단어로 단정하는 일이 아니다. 국가들은 안보와 억지력, 동맹, 핵무기, 지역적 영향력 등 복잡한 목표를 추구한다. 지도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구체적인 정바카라과 증거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목표를 추구하든, 전쟁의 위험과 비용을 결정권이 적은 사람들에게 전가할 수 있는 구조는 비판받아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전쟁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거나 국내 정치에서 지지층을 결집하려 할 수 있다. 군사적 성공을 자신의 업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반면 전쟁이 장기화되면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고, 가족이 해체되며, 물가가 상승하고, 다음 세대의 기회가 사라진다. 지도자가 얻는 정치적 이익과 시민이 감당하는 손실 사이에는 언제나 일치가 보장되지 않는다.
더구나 전쟁은 일단 시작되면 처음의 목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장기적 관성이 생긴다. 이미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 수 없다는 명분, 패배를 인정하면 정치적 바카라임을 져야 한다는 두려움, 군수산업과 무기 조달에 얽힌 경제적 이해관계, 상대방에게 약하게 보이면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안보 논리가 맞물린다. 이런 조건에서는 종전을 위한 타협조차 정치 지도자에게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 결과 전쟁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사람과 전쟁의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협상은 강대국 지도자들의 합의문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는가뿐 아니라 해당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의사가 존중되었는가, 합의가 다시 침략당할 위험을 줄이는가, 피란민이 귀환할 수 있는가, 파괴된 주거와 학교와 병원이 복구되는가, 젊은 세대가 더 이상 전쟁에 동원되지 않을 수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약소국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과 지원국이 자국의 이해에 따라 약소국의 미래를 결정해도 된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동맹과 국제협력은 침략을 억제하고 평화를 지키는 데 중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지원을 받는 나라가 자신의 영토와 안보, 종전 조건을 결정할 권리까지 잃는다면 그 지원은 또 다른 종속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울 권리가 있다. 동시에 미국과 유럽이 자국의 전략적 이해를 고려할 권리도 있다. 그러나 두 사실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동의 없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지는 않는다.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외교적 성과를 위해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안보를 거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평화를 위한 중재가 아니라 약소국의 자기결정권을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전쟁을 시작하는 결정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내릴 수 있지만, 전쟁의 대가는 슬롯 전체가 감당한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기도 전에 군복을 입어야 하는 청년, 폭격으로 집과 가족을 잃은 민간인, 물가 상승으로 생활의 여유를 잃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제2의 얄타회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반드시 세 강대국이 비밀리에 세계지도를 나눠 그리는 장면만을 뜻하지 않는다. 전쟁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무기와 자원을 공급한 강대국들이 이제 그 전쟁을 끝낼 조건을 정하려 하면서, 정작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 국민의 의사를 주변으로 밀어내는 상황도 그 비유가 경고하는 현실이다.
강대국들은 전쟁의 시작과 끝을 전략적 계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무기를 얼마나 공급할지, 경제제재를 언제 완화할지, 어느 영토에서 타협할지, 어떤 안보보장을 제공할지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뤄진다면, 전쟁을 지속하도록 지원한 나라들이 이제는 전쟁을 끝낸다는 명분으로 그 국민의 미래까지 결정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종전 합의는 비판받아야 한다. 전쟁을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당사국의 동의를 생략할 수는 없다. 평화를 원하는 국민의 의사와 어떤 조건에서 전쟁을 끝낼 것인지 판단하는 권리를 모두 존중해야 한다. 총성이 잠시 멈추었다는 사실만으로 평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침략의 위험이 지속되고 국민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강요된다면, 그 합의는 새로운 불안정의 씨앗을 남길 수 있다.
전쟁이 국가의 이름으로 시작되더라도 희생자는 국가라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고, 한 가족의 미래이며, 한 슬롯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삶이다. 우리가 평화를 이야기한다면 바로 그 구체적인 사람들부터 생각해야 한다.
글쓰기가 나약한 저항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을 둘러싼 정치적 구호와 애국주의, 군사적 승리의 언어가 가리는 현실을 드러내는 일은 필요하다. 누구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전쟁이 지속되는지, 누가 그 결정에 참여하는지, 누가 목숨을 잃고 누가 경제적 이익을 얻는지 물어야 한다. 그런 질문이 없다면 우리는 또다시 강대국의 정상회담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기록하면서, 이름조차 남지 않은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통계 속 숫자로 밀어 넣게 될 것이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과 전쟁의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이 다른 세상. 그것이 대리전의 가장 깊은 모순이다. 총을 대신 쏘는 사람들만 대리전의 희생자가 아니다. 그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 폭등한 물가를 감당해야 하는 세계의 시민들까지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사람의 패권 경쟁을 대신 지불하고 있다.
전쟁을 끝내는 협상이라면 먼저 물어야 한다. 그 합의는 누구의 평화를 위한 것인가? 강대국의 전략적 편의인가, 아니면 실제로 전쟁을 겪고 희생한 국민의 안전과 미래인가?
우크라이나 국민의 동의 없이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결정하려는 어떤 시도도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전쟁을 지원한 강대국이 전쟁을 끝낼 권한까지 독점할 수는 없다. 지원은 주권을 대신하는 권리가 아니다. 평화는 강대국들이 합의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해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보장받을 때 비로소 정당성을 얻는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일까지 포기한다면,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언어만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전쟁의 명분 뒤에 가려진 희생의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 글은 적어도 침묵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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