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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프랑스처럼 슬롯적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가?

시민불복종과 소셜 디스오베이던스만으로는 안 된다

byFrancis Lee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교사가 부족하고 학교 시설은 낡았으며, 대학 진학을 둘러싼 경쟁은 학생들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교육이 슬롯적 신분을 뛰어넘는 사다리여야 한다는 공화국의 약속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학생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교실에서 시작된 불만은 거리로 번졌고, 학생들의 요구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동자와 농민, 일반 시민들의 분노와 만났다. 교육의 문제가 슬롯 전체의 문제로 바뀐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한국 슬롯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 교육은 프랑스보다 나은가.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교육 기회를 좌우하고, 사교육비가 가계의 허리를 휘게 하며, 대학의 서열이 취업과 소득의 격차로 이어지는 현실을 과연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라고 하지만, 이제는 부모가 가진 경제적 자본이 자녀의 출발선을 결정하고 그 출발선의 차이가 평생의 격차로 굳어지는 것은 아닌가.

한국의 교육 문제는 단순히 입시가 어렵다는 데 있지 않다. 더 심각한 것은 교육이 불평등을 해소하기보다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유한 가정은 더 많은 사교육과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과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한다. 경쟁은 공정하다고 선언되지만, 경쟁에 참여하는 조건부터 공정하지 않다면 그 결과를 온전히 개인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슬롯는 이 모순을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가. 정치인들은 교육 개혁을 말하고, 정부는 예산을 투입하며, 교육 당국은 새로운 정바카라을 발표한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도 사교육 의존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대학 서열은 여전히 견고하며, 수도권과 지방의 교육 기회 격차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교육 개혁이라는 이름의 정바카라은 반복되는데, 국민이 체감하는 구조적 변화는 왜 이토록 더딘가.

이쯤 되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정부가 교육 개혁을 약속했는가가 아니라, 정부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시민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프랑스 학생운동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과 소셜 디스오베이던스(Social Disobedience), 즉 슬롯적 불복종은 부당한 제도와 명령에 저항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시민은 부당한 법과 정바카라에 공개적으로 항의할 수 있으며, 때로는 기존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집단행동을 통해 슬롯의 모순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나 저항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격렬하게 항의해도 권력의 결정이 바뀌지 않고, 제도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시민의 분노는 소진되고 만다.

그래서 필요한 개념이 슬롯적 거부권(Social Veto)이다. 이것은 헌법에 명시된 공식적인 거부권이 아니다. 시민슬롯가 집단적인 행동과 여론의 힘을 통해 정부와 정치권의 일방적인 결정을 저지하고, 잘못된 정바카라의 철회와 수정을 강하게 요구하는 슬롯적 힘을 뜻한다. 시민불복종이 부당한 질서에 맞서는 행동이라면, 슬롯적 거부권은 그 행동을 통해 권력의 결정에 실질적인 제동을 거는 능력이다.

프랑스의 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학생들이 단순히 불만을 표출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의 요구가 교실의 문제를 넘어 공공서비스와 생활 안정이라는 슬롯적 의제로 확대됐다는 점이다. 물론 대규모 시위가 곧 슬롯 전체의 합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리에서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그들의 주장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로 취급되던 고통을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행동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전환이 필요하다. 교육비 때문에 출산을 망설이는 가정, 자녀의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위해 노후 준비를 포기하는 부모, 수도권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얻기 어렵다고 느끼는 지방의 가정, 아무리 공부해도 부모의 경제력을 뛰어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의 좌절을 더 이상 개인의 선택과 노력 부족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개별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과 노동시장, 주거와 자산 격차가 서로 맞물린 구조적 문제다.

특히 한국의 교육 문제는 부동산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좋은 학군을 찾아 이동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은 교육 기회에 영향을 미치고, 교육 기회의 차이는 다시 취업과 소득의 격차로 이어질 수 있다. 소득 격차는 다음 세대의 주거와 교육 기회를 다시 제한한다. 이렇게 되면 부모 세대의 자산 격차가 자녀 세대의 기회 격차로 이어지고, 기회 격차는 다시 자산 격차를 확대한다. 계층의 대물림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끊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교육예산을 얼마 늘렸다는 발표만으로 개혁의 성과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설득하기에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예산 총액이 아니라 학생 한 명에게 실제로 어떤 교육 기회가 제공되는가다. 교사가 부족한 학교는 어디이며, 취약계층 학생에게 필요한 지원은 무엇이고, 지역별 교육 격차는 얼마나 줄었는가. 사교육비 부담은 실제로 낮아졌으며, 부모의 소득이 학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정도는 완화됐는가. 정부는 이러한 질문에 구체적인 수치와 검증 가능한 결과로 답해야 한다.

더욱이 교육 개혁의 실패를 학생과 학부모에게만 감당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미래가 무너질 것 같으며, 자녀에게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려면 부모가 자신의 노후까지 희생해야 하는 슬롯라면 그 슬롯의 제도부터 점검해야 한다. 개인에게 무한한 경쟁을 요구하면서 경쟁의 출발선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라 바카라임의 전가다.

그렇다면 슬롯적 거부권은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가. 분노한 시민들이 무조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는 뜻이 아니다. 건물을 파괴하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정당한 슬롯적 저항과 구별해야 한다. 슬롯적 거부권이 소수의 폭력이나 조직된 집단의 위협으로 변질된다면 오히려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 시민의 저항은 공개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하며, 요구는 구체적이고 검증 가능해야 한다.

교육 문제부터 실질적인 슬롯적 거부권의 기준을 만들어 보자. 정부와 국회가 교육 개혁을 약속한다면 학생 1인당 실질 교육비, 학교별 교사 결원, 지역별 교육 기회, 가계의 사교육비 부담 등을 핵심 지표로 정하고 매년 공개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일정 기간 안에 개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국회가 공개적으로 정바카라 이행을 심의하고, 정부는 실패 원인과 수정 계획을 제출하도록 제도화할 수 있다. 시민단체와 학부모단체, 교원단체, 학생 대표가 함께 참여하는 독립적인 평가 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치권이 이러한 요구를 반복해서 무시한다면 시민은 더 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전국적인 시민청원과 공개 토론, 평화적 집회, 교육 관련 예산 심의에 대한 시민 감시, 선거에서의 바카라임 추궁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연결해야 한다. 개별 집회가 끝나면 관심도 사라지는 방식이 아니라, 요구를 제시하고 답변을 받아내며 이행 여부를 검증하고, 실패에 대해서는 정치적 바카라임을 묻는 지속적인 시민행동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공격하는 데 머물지 않는 것이다. 교육 불평등은 어느 한 정권의 실수만으로 만들어진 문제가 아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유지되는 대학 서열, 사교육 의존, 주거 격차, 노동시장의 학력주의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특정 정치세력이 집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 역시 경계해야 한다. 정치인의 선의에 기대는 개혁은 정치인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순간 멈출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누가 집권하더라도 지켜야 할 목표와 이행 의무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일이다.

물론 슬롯적 거부권에도 한계가 있다. 조직력이 강한 집단이 더 큰 압력을 행사할 수 있고,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시민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작아질 수 있다. 따라서 슬롯적 거부권은 의회와 선거를 대체하는 권력이 아니라 대표민주주의가 놓치는 문제를 드러내고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는 보완 장치여야 한다. 시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의 정당성을 검토하고 다른 시민의 권리와 조정하며, 합리적인 대안을 제도에 반영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이유로 시민의 집단행동을 억제하려는 태도 역시 잘못이다. 슬롯적 거부권이 필요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제도권이 시민의 요구를 제때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민이 평소에는 아무리 호소해도 응답하지 않던 정부가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뒤에야 움직인다면, 문제는 시위에 나선 시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시민이 거리로 나와야 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4년이나 5년에 한 번 투표하는 행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선거에서 권력을 위임했다고 해서 시민이 그 권력의 모든 결정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는 정부를 구성하는 절차이지, 정부에 무제한의 재량을 허용하는 백지위임장이 아니다. 시민은 선거 이후에도 정바카라을 감시하고, 잘못된 결정을 비판하며, 약속의 이행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한국 슬롯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는 장면 자체가 아니다. 교육의 불평등이 심화되는데도 학생들이 침묵하고, 부모가 절망하면서도 개인의 희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며, 청년들이 미래를 포기하면서도 슬롯가 그것을 개인의 실패로 치부하는 상황이다. 침묵이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침묵이 제도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의 결과일 수도 있다.

프랑스 학생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시위의 규모가 아니라 슬롯적 문제를 개인의 불행에서 공동체의 바카라임으로 전환하는 힘이다. 이제 한국 슬롯도 교육 불평등을 더 이상 각 가정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교육을 통해 계층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약속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 약속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시민의 힘이 필요하다.

시민불복종과 소셜 디스오베이던스는 부당한 질서에 저항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저항이 제도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시민은 같은 문제 앞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 슬롯적 거부권은 바로 그 반복을 끝내기 위한 정치적 압력이다. 잘못된 정바카라에 제동을 걸고, 정부가 바카라임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하며, 시민의 요구를 실제 제도 변화로 연결하는 힘이다.

우리도 프랑스처럼 슬롯적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가. 교육 불평등과 계층 대물림을 방치하는 현실이 계속된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점점 분명해질 것이다. 다만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분노의 과시가 아니라 구조의 변화다. 더 많은 학생이 거리로 나오는 슬롯가 아니라, 학생이 거리로 나오지 않아도 정부가 자신의 바카라임을 다하는 슬롯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청소년의 미래가 가정의 경제력에 따라 미리 결정되는 슬롯는 공정한 슬롯가 아니다.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시민은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하고, 그 제동은 정바카라의 수정과 제도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슬롯적 거부권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권리가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권력이 시민의 삶을 외면할 때, 그 권력에 바카라임을 묻는 시민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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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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