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하루를 덤덤히 마주할, 작고 단단한 맷집을 챙겨 왔다.
비행기는 치앙마이의 밤도, 한국의 아침도 아닌 이름 모를 허공의 경계를 고요히 통과하고 있었다. 짙게 어둠이 깔린 창밖으로 구름의 윤곽과 지상의 작은 불빛들이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짐가방에 미처 다 눌러 담지 못한 감정의 부피를 가늠하며 가만히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한 달의 시간은 나에게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극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시작될, 익숙하고 팍팍한 일상을 덤덤히 마주할 작은 맷집 정도는 챙겨 온 듯했다. 창밖의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비행기 바퀴가 한국의 활주로에 묵직하게 닿았다.
한국에 도착해 무거운 짐가방을 끌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공항 지하 1층 식당가의 분식 코너였다. 식탁 위에 놓인 것은 불과 8시간 전 야시장에서 들이켰던, 달착지근하고 짭짤한 팟타이의 향기가 아니었다. 차가운 은빛 쇠그릇 위로 새빨간 고추장 양념과 김 가루를 수북하게 이고 있는 쫄면, 그리고 짙은 색 밥알 속에 두툼한 달걀을 품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는 단정한 김밥이 그 자리를 대신 꿰차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붉은 양념을 쓱쓱 비벼, 차갑고 탱글탱글한 쫄면을 크게 한 입을 밀어 넣었다. 순간, 달착지근하고 짭조름했던 피시소스의 여운이 머물던 입으로 날카롭고 매콤한 고추장의 맛이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얼얼하게 혀끝을 때리는 자극적인 매운맛과 차가운 면발의 감각은 마치"자, 이제 달콤한 여행에서 깰 시간이야. 정신 차려!"라며 내 뺨을 유쾌하게 찰싹 때리는 듯했다. 지독하게 한국적이고, 지독하게 현실적인 미각의 충격이었다.
매운맛에 흠칫 놀라 들이마신 숨에 서둘러 김밥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짙은 색 밥알 사이로 단연 존재감을 뽐내는 큼지막한 달걀의 부드러움이, 쫄면으로 잔뜩 독이 오른 입안의 열기를 거짓말처럼 포근하게 잠재워 주었다.
그 소박하고도 든든한 포만감을 안고, 나는 일상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무채색의 익숙한 고속도로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치앙마이에서의 소란했던 한 달이 마치 긴 단잠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몇 시간의 달림 끝에 버스는 나를 눈에 익은 동네의 공기 속으로 데려다 놓았다. 묵직한 여행 가방을 끌고 늘 걷던 골목을 지나, 마침내 가장 나다운 공간인 내 집 현관문을 열었다.
달칵,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훅 끼쳐오는, 서늘하고 익숙한 집안의 공기. 오토바이 경적과 웍이 부딪히는 쇳소리, 낯선 언어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던 치앙마이의 야시장과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정적이었다.
신발을 벗고 거실 한쪽에 짐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온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가볍고 단단했다. 5년 전, 베드버그와 열병으로 얼룩져 아쉬움만 가득했던 첫 체류의 기억은 이제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번 한 달 동안 나는 기꺼이 도시의 문턱을 넘었고, 낯선 이들이 내어준 다정한 식탁에 앉았으며, 치앙마이라는 도시와 나 사이에 이토록 따뜻하고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방 한편에 놓인 익숙한 작업 바카라상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당장이라도 펜을 쥐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 다정한 피로감을 안고 푹 쉬기로 했다. 가방 속 꾹꾹 눌러 담아 온 치앙마이의 눅진한 공기와 사람들의 온기는, 내일부터 이 고요한 바카라상 위에서 새로운 그림과 글로 하나씩 펼쳐질 터였다.
길었던 한 달의 짐가방은
마침내 닫혔고,
이제 내가 채워가야 할
텅 빈 화면이 고요한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