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어떻게 살아야하지, 라는 것이 막막해질 때면 나는 항상 죽음을 생각한다.

세네카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은 뒤로부터 생긴 버릇이다.

스토아 철학가 세네카는 말한다. 언제 끝이 다가올지 모를 인간의 인생에서, 당연히 내일을 살 것이라 생각하고, 당연히 10년 뒤에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운명에 대한 인간의 오만함 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고 있나요?' 라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어떻게 죽고 있나요?'라는 말과 같다. 산다는 것은 곧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며,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찰나와 같이 짧게 반짝 빛나는 돌이 되어 우주로 돌아갈 것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내 좌우명도 그렇다.

'후회없이 살자'

다르게 말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후회없이 죽자.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부터 들지도 모르겠다. 인간으로 태어나 후회 한 점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냐는 의문 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언젠가 내가 눈을 감을 그 순간에 미련이 없었으면 좋겠다. 세상 앞에 취약하기 그지 없는 평범한 인간일 뿐인 내가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마지막 순간의 마음가짐 만큼은 선택하고 싶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관용어가 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널리 쓰이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 한다. 신체적 고통은 내가 어쩔 수 없을지라 해도 마지막 순간의 심리적 고통만이라도 줄이고 싶은 인간의 본능.


그런데 사실 삶을 돌아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보다는 '후회'라는 말을 더 많이 써왔다.



그럼 내 삶은 실패한 걸까?





죽음을 직감하면 눈 앞에 주마등이 스쳐지나간다고들 한다. 그 수 많은 장면들 중에서 후회가 몇 개 인지 행복이 몇 개인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보며 자신의 인생을 평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영화 '인사이드아웃2'의 한 장면처럼 내 무의식 속의 감정들이 모여 내 머릿 속 스크린을 담당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죽음을 직감한 순간에만 나타나는 주마등에 상영할 수 있는 장면은 단 10개의 씬.


아마 영화에 잠깐 등장했다가 신속 퇴장 당했던 추억이가 이 일을 할지도 모르겠다. 추억이는 어떤 장면을 고를까? 불안이가 무수히도 많이 그렸던 후회막심한 순간들이 차고 넘쳐서 후회의 순간들을 상영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너무 많아서 10개 이내로 골라야 한다는 선택의 문제에서는 추억이가 곤란해할지도 모르겠다.


후회는 정말 쉽다. 내게 늘 어려운 건 행복이다.

행복까지도 잘 모르겠다.

9개의 후회 씬이 지나가더라도 마지막 한 씬에서만큼은 적어도 '그 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는 안하고 싶다.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살면서 후회도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껏,
힘껏,
나답게 살았던,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잘,
살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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