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 그 귤은 달콤한가요?

과일 가게에서 만난 노후의 오답 노트

by호사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일순간 뇌가 멈췄다. 토요일 오후, 집들이 초대를 받아 낯선 동네로 향했다. 지하철역에서 지인들과 만나 초대받은 집으로 가기 전, 근처 과일 가게에서 과일을 사는 중이었다. 고른 과일을 계산하러 지인이 가게 안 계산대로 향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가게 밖 인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탐스러운 가을 과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매대에서 물오른 과일의 자태를 감탄하는 사이 한 노년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가면서 봐도 부부는 아닌 것 같은 묘한 다정함에 호기심이 발동해 시선이 자동으로 따라갔다. 꽁냥 거리며 한참 과일을 고르던 커플 중 낡은 회색 양복 차림의 남자가 사과가 담긴 바구니를 하나 집어 들고 가게 안쪽 계산대로 향했다. 진한 화장에 핑크색 시폰 원피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따라 들어가려다 중간에서 멈췄다. 추가로 과일을 고르려나 싶었다. 그런데 이어진 기이한 행동에 시선이 멈췄다. 계산대를 바라보고 남자의 계산 상황을 지켜보며 서더니 뒷짐을 지듯 진한 자주색 매니큐어를 칠한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을 허리춤 뒤로 넘겼다. 그리고 그 손은 샤인머스캣 상자 안의 포도알 하나를 따서 몰래 입에 쏙 넣었다. 행동이 워낙 부자연스러워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포도를 사려나 싶었는데 뒤이어진 행동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계산대에서 보면 잘 안 보일 기둥 뒤로 슬쩍 가더니 주인이 계산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귤 바구니 맨 위의 귤 하나를 집어 재킷 주머니에 쓱 넣었다. CCTV도 없는 어수선한 과일 가게를 잘 안다는 듯한 거침없는 행동. 여자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수상한 낌새에 지켜보던 나는 당황해서 함께 기다리던 다른 지인들에게도 조용히 상황을 알렸다.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남자의 계산 진척 상황을 살피며 귤을 또 하나 주머니에 넣었다. 얼른 뛰어가서 저 여자 손목을 비틀어야 하나? 한참 과일 정리에 정신없는 직원이나 사장님께 알려야 하나? 짧은 순간 고민하는 사이 계산을 마친 남자가 나오니 팔짱을 쏙 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처음이었다.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재미 삼아 훔치는 사람을 직접 본 것을. 라면이나 밥처럼 끼니가 될 거를 훔친다면 배고파서 그런 건가?라고 생각이라도 할 텐데 훔치는 게 겨우 과일 몇 알이라니. 생존을 위한 절박함보다는 오래된 버릇처럼 보였다. 저 나이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훔쳐 왔을까? 오래된 나쁜 손버릇은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걸까? 은근한 분노가 머릿속을 채웠다.

중년을 넘어선 지금, 이제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어떤 노인이 될까 궁금하다. 그래서 나보다 나이 든 사람을 볼 때 더 유심히 보게 된다. TV에서건 거리에서건 바카라에서건 닮고 싶은 어른도 많다. 다정함, 여유, 지혜, 용기 등등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았을 그 성취를 가진 어른을 볼 때면 그들의 습관과 행동을 따라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내 인생에 “어디 어린것이 감히! 어른이 말하면 ‘네‘하고 대답해야지.”라고 말하던 이름만 어른인 사람도 있었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하는 말이 다 옳은 줄 알고 믿었는데 나이를 들수록 나이가 많다고 자동으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구나 느낀다. 무례한 어른, 무바카라임한 어른, 무지한 어른, 몰상식한 어른, 불쾌한 어른을 만나고 나면 저렇게는 늙지 말아야지 다짐하곤 했다. 일부 악질 어른들의 행태에 분노만 할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인생의 오답 노트로 여기고 그 어른과 정반대의 길로 가려고 노력 중이다.


나쁜 일을 하도 많이 해서 나쁘다는 자각조차 없이 늙어가다 보면 과일 가게에서 본 좀도둑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겠구나 싶었다. 부끄러움도 없이, 미안함도 없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사는 삶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닐 테니까. 작은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다 보면 어느새 부끄럽다는 감각 자체가 사라지나 보다.


노후 준비에는 연금이나 건강검진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노인이 될 것인지도 가끔 생각한다. 일단 목소리부터 커지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빈자리가 났다고 엉덩이부터 들이미는 사람도 안 되고, 젊은 사람에게 훈계부터 하는 사람도 되지 말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할 줄 알고, 혼자서도 잘 놀고, 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지 않는 낡은이가 되면 좋겠다. 되고 싶은 노인의 모습이 많은데 그런 어른이 되는 건 완벽한 이상형을 찾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안다. 과일 가게 좀도둑 할머니를 보고 노후 준비 목록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적어도 남의 과일을 몰래 주머니에 넣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서는 사람은 되지 말자고. 그러려면 지금부터 정신 줄 바짝 붙잡고 잘 늙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