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알게 된 우중 러닝의 맛
딱 걸렸다. 평소 저녁 7시에 달리기를 시작해 10km를 뛰는데 저녁 7시부터 시작된다는 비 소식에 난감했다. 연휴라 비 오기 전 언제 달려야 하나 종일 생각날 때마다 일기 예보를 확인했다. 1시간, 2시간 비 시작 시간이 밀리더니 어느새 아예 우산 표시가 사라졌다. 그럼 루틴을 지켜야지. 생각하고 저녁 7시 평소처럼 뛰러 나갔다. 그런데 5km 반환점을 돌아 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점점 방울이 커지더니 금세 폭우로 돌변했다.
일단 전력을 다해 뛰어 가까운 다리 밑으로 향했다. 바다나 계곡에 가도 젖는 게 싫어 발만 살짝 담그고 나오는 사람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다니. 장마 때처럼 쏟아지는 비는 갈수록 기세가 거셌다. 뛰는 내내 기상청이 살짝 미웠다. 내가 오늘 몇 번이나 일기 예보를 확인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축축하게 젖은 운동화를 신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쩌걱쩌걱 소리를 냈다. 발바닥에서부터 나쁜 기분이 퍼지는 게 싫었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는 게 싫고, 눈 안으로 흘러드는 빗물이 싫었다.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쏟아지는 비가 야속했다.
운이 좋았다. 1년 넘게 달리기를 했지만 계획형 인간의 철저한 준비 덕에 폭우 속을 달리는 일은 없었다. 운동을 마친 후 집에 거의 도착해 비가 쏟아지거나 운동화 앞코만 살짝 젖는 정도의 비를 맞은 적은 있지만 온몸이 흠뻑 젖을 만큼 비를 맞은 적이 없었다. 나는 기록을 위해 달리는 프로 러너도 아니다. 잡생각을 떨치고, 다운된 기분을 끌어올리고, 먹고 싶은 걸 먹어도 죄바카라감을 덜기 위해 뛰는 갱년기 임박 취미 러너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상상했다. 달리기를 하다가 갑자기 비가 오면 어쩌지? 많은 선배 러너들은 말했다. 우중 러닝만의 맛이 있다고. 날씨 좋은 날에 뛰는 것과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새장 속의 새처럼 사는 현대 도시인이 평소에는 느끼기 어려운 해방감과 성취감이 있다고 칭송했다. 아무리 우중 러닝이 좋다고 해도 솔깃하지 않았다. 운동화는 젖고, 몸도 엉망이 될 텐데 내가 프로 선수도 아니고 굳이 비까지 맞으면서 달려야 할까? 만약 비가 오면 달리던 걸 멈춰야겠다고 계획형 인간은 일찌감치 돌발 상황의 결론까지 계획해 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내달리고 나서야 겨우 다리 밑에 도착했다. 이미 만원이었다. 반려견과 산바카라 나온 젊은 커플, 자전거를 타다 피신한 소년들, 식후 산바카라을 나온 할아버지 등등 여유로운 연휴의 밤을 만끽하러 온 사람들의 발이 묶였다. 비 때문에 들어온 다리 앞에 모여 고개를 빼꼼 내밀어 하늘의 심기를 살피고 있었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거북목을 쭉 펴서 다리 밖 상황을 보며 언제쯤 비가 그칠지 주시했다. 하늘 전체가 시커먼 비구름이 퍼져 있었다.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4km 넘게 남았는데 걸어가나 뛰어가나 젖는 건 마찬가지고, 우산을 사러 가자니 편의점까지도 한참이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냅다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달렸다.
하필이면 평소 쓰던 모자도 쓰고 오지 않은 날 비라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머리카락에 떨어진 빗방울이 모여 이마를 타고 내려와 눈을 파고들었다. 눈은 뜨기 힘들고, 비에 젖은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시야가 흐려 컴컴한 길 곳곳에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보지 못해 발이 푹푹 빠졌다. 내가 싫어하는 모든 감각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싫다. 싫다. 싫다를 속으로 읊조리며 한발 한발 내딛는 사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차가웠던 빗방울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뛰면 뛸수록 몸에 열이 오른 탓이다. 속도도, 시선도 상관없었다. 그냥 달리고, 목표 지점에 도착한다. 딱 두 개만이 내게 있었다. 영화 <싱인 인 더 레인>의 주인공처럼 빗물 웅덩이를 찰박찰박 뛰어 신나게 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정 같던 물웅덩이가 탭댄스 무대처럼 느껴졌다. 길이 비에 젖은 탓에 발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촵촵촵촵. 리드미컬한 발소리에 더 신이 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아! 선배 러너들이 말한 우중 러닝이 주는 해방감+성취감이 이런 거구나. 그제야 알게 됐다.
경쾌한 발소리를 BGM 삼아 평소 보다 더 리듬을 살려 달리니 어느새 목표 지점이 멀지 않았다. 그 사이 비도 잦아지고, 흠뻑 젖은 생쥐 꼴로 스마트 워치의 ‘운동 종료’ 버튼을 눌렀다. 분명 뛰기 전까지는 쌀쌀하다고 느꼈던 날씨였는데 달리느라 뜨거워진 몸에 닿은 빗방울들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런 거지 같은 날씨에도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뛴 덕분에 오늘도 목표 달성 완료라는 결과가 남았다.
평소와는 다른 해방감과 성취감에 취해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 변덕스러운 하늘은 잠시 멈췄던 빗방울을 슬슬 다시 쏟아내고 있었다. 집까지 또 뛰어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한 시간 동안 비를 맞았으니 더 젖을 곳도 없었다. 집에서 한 블록 거리쯤 남았을 무렵,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커다란 노란 골프 우산을 든 작은 사람. 수술한 왼쪽 무릎을 살짝 절뚝이며 걸어오는 사람은 꼼짝없이 빗속을 달렸을 딸 걱정에 노심초사한 엄마였다. 거리가 좁혀져 내 얼굴을 확인한 엄마가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엄마는 품에 끼고 온 따끈한 우산을 내게 건넸다. 이미 흠뻑 젖은 나는 엄마가 건넨 우산을 받아 들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