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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으로 알아차리는 일

LST-1 망원경에 비친 페르세우스 자리 유성

by미지의 세계
LST-1 망원경에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이 비친 모습 / 출처 - NASA https://science.nasa.gov/image-article/apod-2026-september

NASA가 9월 26일 ‘오늘의 천문 사진’으로 소개한 사진이다. 스페인 라팔마섬에 있는 거대한 망원경 LST-1의 거울에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이 비쳤다.​


거울이라는 특성 때문에 포착된 모습이지만, 사실 이 망원경이 관측하려는 것은 별빛 자체가 아니다. 우주에서 감마선이 날아오면 지구 대기와 충돌하면서 입자들이 생기는데, 이때 입자는 대기에서 아주 짧은 순간 동안 희미한 푸른빛을 낸다. LST-1은 바로 그 빛을 모아 원래 감마선이 어디서 왔는지 역추적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우주에서 날아온 것이 지구에 남긴 흔적'을 관찰하는 것이다.


흔적은 보통 희미하고 간접적이다. 어떤 사건의 이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흔적이 남겨지게 된 사정을 알게 되면 오히려 의미가 선명해지기도 한다.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자다가 문득 깼는데, 자고 있던 방의 문이 닫혀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 당장 더운 느낌과 새벽에 느낄 싸늘함 사이에서 문을 닫을지 말지 고민했던 게 떠올랐다. 결국 열어두었는데 그게 딱 닫혀있었던 거다. 아침에 다른 방에서 잤던 남편에게 물었다.


"혹시 우리 방문 닫았어?"

"응. 새벽에 추울 것 같아서. 감기 들면 안 되잖아."


닫힌 문은 보통 단절을 상징한다. 하지만 뒷이야기를 알고 나면 닫힌 문에서도 사랑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모든 흔적을 미화하고 싶은 건 아니다. 사실 어떤 흔적은 지나치게 구체적인 사실을 떠올리게 해서, 오히려 과거를 나쁘게 덮어버릴 때도 있다. 고3 때 대입 준비를 하면서는 논술 학원을 다녔다. 논술 선생님은 어느 명문대의 철학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그는 글만 봐준 게 아니라 전개에 필요한 철학 지식들을 함께 알려주기도 했다. 당시 교과 과목만 기계적으로 공부하던 내게 그분의 가르침은 너무나 행복한 자극이었다. 비록 논술로 대학에 가진 못했지만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좋게 남아있었다.


그러다 어느 설날 연휴 때, 문득 논술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졌다. 이미 대학도 다 졸업하고 슬롯 초년생으로 지낼 때였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옛날 메일 주소를 찾고, 그분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런데 구체적인 문장으로 다시 확인한 과거는 기억과 사뭇 달랐다. 그가 첨삭해 준 자기소개서에 허점이 많았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메일 내용 중 '내가 너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술 먹다 와서 이거 고쳤다.'는 문장에는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바카라임지는 어른의 모습 같기도, 그냥 관성적으로 일한 직업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어릴 적에는 '아, 선생님이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나 애써주셨구나.' 하며 마냥 감동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절박했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결국 나는 그 선생님한테 안부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마냥 좋은 말만 담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분께 듣고 배운 이야기는 여전히 소중한 추억로 남아있지만, 추억을 지금으로 끌고 오고 싶은 생각은 그렇게 사라졌다.



애초에 흔적이란 게 아름다움을 따질 수 있는 건가. 최근에 애써 지우려고 했던 흔적을 돌아본다. 얼마 전, 아이들 겨울 외투를 꺼내 빨았다. 겨울을 앞두고 처음 꺼낸 것이었지만 얼룩이 있어서 애벌 빨래를 해야만 했다. 남편이 중고 시장에서 사 온 옷들이었다. 얼룩은 판매자가 여러번 강조했던 이야기, '생활감 있음'의 증거였다.


사실 나는, 특히 아이들의 옷은 중고로 사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아이들은 흙에서 뒹굴고 논다. 그래서 얼마 안 입었다고 해도 옷이 쉽게 해진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놀 것이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튼튼하면서도 아무 손도 타지 않은 새 옷을 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생각이 달랐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리고 아이들의 몸이 거의 하루하루 쑥쑥 크기 때문에 옷은 중고를 사서 철마다 입히고 정리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점차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창 열을 내면서 소리치고 있는데 문득 내 팔과 다리를 꼭 붙들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내가 무엇을 위해 소리치고 있는지 멍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거의 새것' 같은 것도 있어. 포장 안 뜯은 것도 있고. 그런 거 사면되지. 네가 골라."


남편은 선심 쓰듯, 중고 플랫폼의 링크를 보냈다. 그나마 손을 가장 덜 탄 것 같은 외투를 눈 아프게 골라내어 겨우 구매 버튼을 눌렀다. 내가 빨고 있었던 옷들이 다 그런 과정을 거친 옷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중고는 중고다. 이름 모를 아이들이 남긴 생활 흔적을 지우면서 자꾸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으휴, 으휴' 한숨도 쉬었다.


그러나, 잠시 쉬었다가 빨래를 꺼내 너니 옷이 정말 새것 같아져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어쩌면 저 중고 옷은 아이들을 생각하는 그의 사랑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그는 중고 구매를 할 수 없는 것들을 주겠다고 했다. 여행을 통한 경험 같은 것들 말이다. 서운함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중고 옷을 보는 시선이 한결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새벽에 남편이 닫아주었던 방문을 다시 떠올렸다.​ 은은한 세제 향을 맡으며 남편이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사랑들을 생각했다. 흔적으로 알아차리는 일은 결국, 다른 흔적들을 함부로 흘리지 않는 것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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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프리랜서 방송인, 현직 남매 엄마이자 과학해설사.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해요. 매일 검열하고 싸우면서 문장을 써요. 그래도 결국은 따뜻하고 재미있는 글쓰기를 소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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