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로 떠나고 싶어

스티브 형과 함께하는 아침

by박민진

오전 10시 운동이라서 9시 20분 정도 알람이 울린다. 오늘은 끄고 다시 잤다. 알람은 9시 40분에 다시 울렸다. 바로 일어나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알람을 끄고 운동 예약까지 취소했다.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 나는 고양이 율이를 잠시 쓰다듬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다시 잠들려는 찰나 혹시 몰라 카톡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까’라는 마음에는 불안과 기대, 예감과 우울이 섞여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습관처럼 유튜브를 열었다. LA 날씨는 한국보다 더 더워 보인다. 그가 사는 세리토스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동네다. 스티브는 오늘도 짐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아주 무거운 중량을 들지도, 크게 무리하지도 않지만 그는 눈에 힘을 팍 주고 쉰이 넘은 몸에 고통을 부여한다.


스티브는 내 어린 시절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무대에서 방방 뛰어다니는 그의 무대를 빠짐없이 챙겨 봤다. 말 그대로 본방사수. 그 활기와 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지금은 잊혀 가는 그가 10만 유튜버가 됐다며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집 앞에서 방방 뛰는 게 웃프다. 꽤 멋진데 중력에 저항하며 짓는 표정이 내가 헬스장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과 비슷하게 보여서다. 그는 근육량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나이에 아침부터 카메라를 켜고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 나도 구독자로서 그의 영상을 보며 아침을 시작한다. 그가 아침에 찍고 저녁에 편집해서 올리면, 나는 다음 날 아침에 그걸 보고 좋아요를 누르는 식이다. 오늘 난 방방 뛰는 스티브를 보며 몸을 일으켜 가까스로 체육관에 도착했다. 이미 예약은 취소했지만, 영상을 다 보고 나니 혼자서라도 운동하고 싶어졌다. 형 저도 웨스트사이드! 헬스장을 울리는 노래는 켄드릭 라마였지만, 난 나나나의 비트에 맞춰 미국 서부 힙합 정신으로 운동을 마쳤다.


스티브는 오늘 스쿼트를 했는데 높지 않은 중량으로 그다지 무리하지 않고 운동을 마쳤다. 200킬로가 넘는 바벨을 들고 물구나무를 서는 그런 유튜버들이 넘쳐나는 유튜브 세계에서 그의 운동 영상은 미미해 보인다. 조회수도 높지 않고 반응도 영 별로다. 하지만 나는 그와 나를 동일시하며 몰입한다. 열 살 많은 76년생 형이 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노익장을 뽐내면서 아직도 시그니처 손동작으로 웨스트사이드를 외칠 때 나도 포효한다. 그가 꾸러기 표정을 지을 때 나도 미간에 절취선을 더한다. 어쩌면 요즘의 나에게는 그가 모티베이터다. 한국 슬롯는 일본보다 십 년 가량 뒤처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은 경제 침체와 프리터, 싱글 가구 등의 슬롯 변화를 답습했다. 어쩌면 나의 십 년 뒤가 스티브와 같다면 좋을 것 같다. 세상을 좀 더 비장하게 맞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가 한 세트를 할 때마다, 나는 그가 무대에서 외치던 가사를 떠올린다. 그 카리스마 넘치던 뮤직비디오. 호소력 짙은 목소리. 반주만 들어도 가사말이 술술 입에서 흘러나온다. 기억은 참 무섭기도 하지. 그는 운동이 끝나 갈 때쯤이면 더 오버한다. 5주 연속 1위를 했을 때 동료들의 축하 속에서 추던 춤처럼 신명나다. 떠나가는 여인을 놓칠 수 없다고 절규하는 가사가 BGM으로 흘러나온다. 뱀에게 온몸이 휘감긴 라오콘 군상처럼 보일 정도로 비장미 가득하다. 그렇지만 스티브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열정으로 이겨낼 것이다. 내일 아침에 또 구독자와 나를 위해 체육관으로 출근할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세상 모든 순정일 테니까.


그는 오늘 짤막한 인터뷰에서 의지나 기백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긍정심리학의 대가 마틴 셀리그먼의 말을 복붙한 듯했지만, 우리 형이 몸소 근육을 쥐어짜며 한 말 아닌가. 내 눈망울이 살짝 젖어 간다. 꺾이지 않고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어라. 예 형! 나도 같은 심정으로 45분짜리 운동 코스를 소화했다. 조만간 노래방에 가야겠어.


스티브를 좋아하던 시절은 우리 집안이 고꾸라지던 때와 겹친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온갖 욕설과 폭력 속에서도 의지를 다졌다.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 망할 집구석 언젠가는 떠날 거다. 스티브 형이 사는 LA로 가야지. 지옥에서 춤을 추던 나는 그렇게 그와 나를 겹쳐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세상을 향해 외쳐대는 노랫말에 과몰입해 ‘나나나’를 외쳤다. 어두워진 가리워진 나의 길을 밝혀주는 이 노래를 함께 해봐. 그때는 내가 그처럼 스물다섯이 되면 어떨까 상상했다. 그가 노래한다. 소년이여 나가 외쳐라! 웨스트사이드 힙합! 그가 병역 기피로 입국이 막혀 망연한 표정을 짓던 장면은 잊기로 했다. 누구나 그런 흑역사는 있으니까. 나의 스물다섯도 사무실에서 갑질하는 조 대령님 비위를 맞추다가 지나갔잖아. 노래방에서 땡벌 부르면서 춤도 췄잖아. 그렇지만 찌푸린 미간에 담긴 의지와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잖아. 나도 그처럼 이겨내고 지금 체육관에 나와 있잖아. 내 가슴 깊은 곳의 사랑 노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영상을 올려주는 스티브 형만 있으면 난 지지 않을 것이다.


난 오늘도 그의 노래에 맞춰 운동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아무도 내가 유승준과 함께 아침을 시작하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릴 모피쉿의 곡으로 바꿔 틀었다. 요즘 애들 노래는 참, 가사가 뭐 이렇게 매가리가 참, 힙하네 힙해. 시리야, 다음 곡은? 이센스 MTLA입니다. 그거 좋다. 그거 틀자.


여권에 찍힌 도장과 빈 페이지
어릴 때 사진이 붙어있네
11시간 날아서 얻을 휴식
짐 싸네 살러 갈듯이

I wanna move to LA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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