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며 신발장 앞에서 꽤 머뭇거렸다. 오래전에 사둔 구두를 손에 들었다. 비싼 값을 주고 샀지만 신지 않는 가죽 수제화였다. 두 번 신었나. 신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랑 어울리지 않아. 갈등하다 결국 구두를 신고 나섰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공에서 턱 턱 소리가 났다. 또각또각은 아니었다. 낯선 소리가 주는 긴장감이 오랜만에 마음을 들뜨게 했다. 발 끝에서부터 온몸이 싱싱하게 당겨지는 감각이 아찔했다. 발바닥이 조여 오는 팽팽한 걸음은 쾌청한 요즘 날씨와 잘 어울렸다. 나는 오늘 그럴듯해 보이고 싶었다. 지적인 분위기를 주고 싶어서 세탁소에 맡겼던 바지를 입고 셔츠도 걸쳤다. 약속 시간은 1시였다.
오늘은 다른 회사와 협약이 있어 가는 길이었다. 은행이고 대기업이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위축됐다. 본사 건물에 들어서자 계급적 위축감이 느껴졌다.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살았는데도 슬롯생활이라곤 군부대만 전전하다 보니 번지르르한 곳만 가도 괜스레 기가 죽었다. 사실 이오니아식 건축을 흉내 낸 로비는 구식으로 보였다. 막무가내로 가져다 쓴 대리석이 신전처럼 시원하긴 했다. 시계는 12시 반이었다. 1층 커피숍에 앉아 약속시간이 되길 기다리기로 했다. 로비에 점심시간을 맞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원증과 커피 그리고 잘 갖춰진 얼굴이 가득했다. 메뉴판을 가지고 오는 직원에게 시원한 카페 모카를 달라고 했다. 공복이라 당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점심이라 카페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거나 담소를 나누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종업원이 기다란 유리잔에 생크림이 얹어진 카페모카를 내려놨다. 빨대로 한입 쪽 빨아먹으니 머리가 쨍해지는 기운이 났다. 오래전 집 앞 스타벅스에서 커피모카를 마셨을 때 그 깊고 그윽한 단맛에 반했던 기억이 났다. 커피 한 잔에 6천 원이라니, 학생 때라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이었다. 햇빛이 작열하던 어느 여름날, 용기 내어 들어간 가게에서 난생처음 마셔보고는 숨을 헉하고 몰아쉬었다. 그때 나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료가 있다니! 하고 감탄했다. 나른한 표정으로 폰을 보며 볼우물에 힘을 주어 다시 한번 커피를 쪽 빨아 마셨다. 카페인이 온몸에 퍼져 나가며 세포 하나하나를 건드렸다.
로비를 지나다니는 대기업 직원들은 다들 말쑥해 보였다. 나의 옷은 너무 무난하다고 할까 답답할 정도로 평범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때 담당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악수를 청했다. 저는 물 한잔만 주세요.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작년과 비슷하게 해 주세요. 네, 좋습니다. 나는 군 시절 200억 규모 사업 담당으로 업체 담당자에게 예산을 내려주던 때와 반대가 된 내 처지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몇 가지 기억할 만한 것들을 메모하며 그의 얘길 경청했다. 그러다 무심코 그의 구두에 시선이 머물렀다.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구두는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나는 얘기를 이어나가며 그의 옷차림을 흘끔거렸다. 화려함이나 맵시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그가 무척 깨끗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 처음 돈을 벌던 시절, 서울에 관사를 받고 난 본격적으로 소비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조심스럽고 수줍었지만 하나하나 날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옷과 운동 용품 그리고 커피와 식사에 돈이 집중되었다. 절약하지 않으면 돈을 모으기가 힘든다는 건 잘 알았다. 씀씀이가 커 눈만 높아진 게 아닌가 싶어 죄바카라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옷의 감촉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커피의 향에 매료됐다. 처음에는 단맛이 좋았지만 점차 신맛과 쓴맛을 알아가게 되었다. 여러 종류의 운동화를 계속 사들였다. 운동하는 온라인 게임인이라고 블로그에 적어두고 폼을 잡았다. 전에 없던 설렘과 만족이 찾아왔다. 그리고 만약 그런 기분도 구매할 수 있는 거라면 계속 지갑을 열 생각이었다. 이 정도는 낭비가 아니라 경제적인 행복이라고. 술값으로 몇십만 원씩 쓰는 놈들보다야 낫지 않냐고 합리화했다.
한 번 높아진 눈은 다시 낮추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는 주변 지인들의 조언도 한몫했다. 바카라에는 돈 아끼는 거 아니라고, 일하는 현대 남성은 문화생활을 해야 하는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식의 풍습에 물들어갔다. 그래도 가방은 좋은 거 사야지. 시계는 하나 있어야지. 차는 외제차를 사야지. 코트는 버버리지. 그렇게 하나하나 구색을 갖추다가 언젠가부터 바카라과 영화에 돈을 몰아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얘기할 수 있는 커뮤니티로 내 돈이 옮겨갔다. 매달 60만 원을 커뮤니티에 넣었다. 트레바리, 문토, 러닝크루는 내가 산 바카라과 영화 그리고 운동복을 자랑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모임을 준비하려고 스타벅스에서 카페 모카를 마시면서 글을 썼다. 커뮤니티에 입고 가려고 여의도 IFC 몰에서 카드로 깡을 하듯 옷을 구매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계약하고 난감을 표정을 짓자, 딜러는 왜 새 차를 보고 그런 표정을 짓냐고 물어봤다. 난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내 앞에 앉은 박 부장님을 보면서 오랜만에 나의 소비력을 과시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모임에서 처음 만난 이들이 기억난다. 지금은 구의회 의원도 있고, 어디 스피치 기업 대표도 있으며 유명한 IT 기업 직원에, 다들 뭐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남들 눈을 보며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 둥글게 의자를 모아 앉아 서로를 쳐다보던 시간을 기억한다. 특히 난 명문대를 나와서 전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한 친구를 유심히 바라봤다. 나랑 나이가 비슷했지만 나와는 달리 성격이 밝고 명랑했다. 그의 얼굴은 빛이 났다. 그건 단순히 깨끗한 피부가 아닌 그 사람의 성장 환경, 식단, 심리적 여유, 취미 생활, 건전한 태도 등 모든 것이 어우러져 드러나는 안색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런 낯빛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론 언짢아했다. 그건 열등감이자 전에 없이 내가 누군가를 의식하고 신경 쓰고 있다는 불쾌한 신호였다.
그는 줄곧 내 의식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의식은 조금 더 예쁜 것, 조금 더 세련된 것, 조금 더 여유로운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아직 젊고 벌 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소비에 주저함이 없었다. 언제였던가. 그것들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게 된 것이. 미팅은 금방 끝이 났다. 운동화와 반바지 그리고 자전거의 환한 빛을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지금 누구를 의식하여 어떤 돈을 쓰고 있을까. 아내가 교사라고 했던가. 그가 지나치게 잘되지는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낯빛이 좋던 그 친구는 인물이 변변치 않은 신부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난 그가 더 괜찮은 결혼을 할까 봐 조바심을 냈다는 걸 깨달았다. 못된 심보지만 내가 그렇게 상대를 향해 들끓을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