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병자년) 늦가을, 초량왜관 설바카라문(設柵門) 터
목을 가둔 칼틀의 각진 느티나무와 삭아빠진 쇠못의 하중이 쇄골 뼈를 짓눌렀다.
발을 디딜 때마다 터진 무명 버선코 사이로 잘게 부서진 깬돌과 차가운 흙모래가 파고들었다. 뒤따르는 포교가 굵은 삼끈을 거칠게 잡아챘다. 반동에 차꼬를 물린 발목 살갗이 벗겨져 나갔다.
그러나 사내의 시선은 발치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늦가을의 뿌연 해무 너머로 낯선 풍경의 골격이 드러나 있었다.
이백육십 년 동안 조일 양국의 삶과 죽음을 가르던 소나무 설바카라(設柵)은 제 기능을 잃고 방치되어 있었다. 쪼개진 채 넘어진 목바카라의 빈자리마다 밑동만 썩은 기둥들이 이빨처럼 박혀 있었다. 남아 있는 설바카라문의 빗장은 풀려 허공에서 덜렁거렸다. 국경의 문지방을 알리던 턱은 수레바퀴와 구둣발에 깎여 평평한 흙길로 변해 있었다.
빗장이 풀린 그 길 위로, 검은 털옷을 입고 상투를 자른 일본인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조선 땅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넘어오고 있었다. 순사들의 구둣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허리춤 가죽 띠에 꼬나 찬 칼은 걸을 때마다 쇳소리를 냈다.
저 멀리 초량 선창 포구에는 닻을 내린 거대한 철갑선이 굵은 굴뚝으로 검은 연기를 게워내고 있었다. 석탄재 섞인 매캐한 유황 냄새가 갯바람을 타고 목구멍을 텁텁하게 틀어막았다. 대마도를 왕래하던 돛 달린 목선들은 몇 척 남지 않은 채, 밧줄에 묶여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바카라을 지키던 조선 군관들의 자리는 어느새 일본의 영역으로 넘어갔고, 조선의 법도와 금표(禁標)가 물러난 공터 앞에는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라는 푯말이 세워졌다.
덜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함께 사내의 발걸음이 멎었다.
오래전 피가 튀었던 바로 그 자리, 얼어붙은 자갈밭 한구석에 거친 짚으로 짠 멍석 한 장이 깔려 있었다.
잡풀과 흙탕물에 밑동이 덮인 『약조제찰비』가 상반신만 밖으로 내놓은 채 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비바람에 깎여나간 화강암 표면의 붉은 음각, '일죄(一罪)'라는 두 글자는 모진 세월에 풍화되어 검게 때가 탄 흉터가 번져 있었다.
형대 주변으로 늘어선 인영들의 관복이 흐린 햇살 아래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상석 곁에는 파직된 정현덕의 뒤를 이어 부임한 신임 동래부사가 굳은 낯으로 남색 관복을 단정히 여민 채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사역원의 장부를 가슴에 품은 채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는 새로운 왜학훈도의 옥색 도포가 보였다.
그 맞은편, 불과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는 서양식 흑색 연미복을 빼입은 중년의 모리야마 시게루와 하카마를 단정히 차려입은 대마번의 바카라사 오시마 도모노조가 서 있었다. 챙 넓은 모자를 손에 쥔 모리야마는 팔짱을 낀 채,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단두대로 끌려온 주름진 사내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침묵을 가르고 한양에서 내려온 의금부도사가 품속에서 빳빳한 교지를 펼쳐 들었다.
먹물이 번진 한지가 마른 삭풍에 퍼럭이는 소리가 났다.
메마르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형장의 허공을 짓눌렀다.
"죄인, 전 왜학훈도 안동준."
도사의 낭독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너는 변방의 소임을 맡아 오랫동안 왜학의 문자를 다루어 왔으면서도, 천하의 대세와 시무(時務)를 깨닫지 못하고 오직 고루하고 완악한 척화의 사설(邪說)에만 얽매였다. 이웃 나라의 사절을 가리켜 함부로 '왜적(倭賊)'이라 능멸하고, 대일본국이 보내온 국서를 고의로 물리치며 화호(和好)를 가로막았다."
도사의 서슬 퍼런 낭독마다, 잿빛 바다의 파도 소리가 그 틈새로 간간이 부서졌다.
“또한 너는 왜관 개시(開市)의 공역(公易)을 관장함을 빌미로, 조정이 내린 세사미두(歲賜米豆)와 관창의 인삼, 은괴를 간사하게 농간하여 사사로이 빼돌려 착복하였다. 관청의 장부를 조작해 나랏돈을 도적질하고, 그 거대한 포흠(逋欠)과 횡령의 죄과를 은폐하고자 변방의 불화를 일부러 부추겨 양국 간의 틈을 벌려놓았으니, 관원의 직분을 악용해 제 잇속을 채우고 국가의 기강을 농락한 간악함이 극에 달하였다.”
헛기침을 한 번 한 도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사로운 궤변으로 양국의 분쟁을 획바카라하여 하마터면 변방에 거대한 병화(兵火)를 부를 뻔하였으니, 이는 조정을 욕보이고 국경의 평화를 깨뜨린 대역부도의 죄과이다. 이에 주상 전하의 윤허를 받아, 성법에 따라 참형에 처하여 양국의 신의를 바로잡고 백성들에게 국법의 엄중함을 경계하노라."
동준은 입술을 열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그가 걸어 들어온 행로를 눈으로 되짚고 있었다.
왜관 터에서 나와, 흔적만 남은 설바카라 문지방을 넘어, 짚으로 짠 멍석까지.
이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죄인을 꿇려라."
도사의 호령과 함께 포교들의 거친 손아귀가 동준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무릎뼈가 언 땅 위의 멍석을 거칠게 짓찧었다. 짚풀의 메마른 감촉 너머로 알 수 없는 온기가 전해왔다.
동준은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목을 길게 뺀 채, 회색빛으로 일렁이는 수평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새로 닦인 신작로 너머, 모리야마의 차가운 시선도, 신임 부사의 굳어버린 얼굴도 그의 망막에 머물지 않았다. 비석에 새겨진 '일죄'의 글자는 더 이상 양국의 조약문이 아니었고, 사역원의 해묵은 훈도록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흩어진 뒤였다. 다만 일렁이는 동래의 물결, 그 파고를 천천히 눈에 담았다.
등 뒤에서 탁주 한 바가지가 허공으로 뿜어졌다. 시큼한 술 냄새와 젖은 쇳내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망나니가 어깨를 비틀며 시퍼런 환도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파억!
둔탁하고 묵직한 파열음이 갈대밭의 적막을 갈랐다.
버려진 비석의 거뭇한 음각, '일죄(一罪)' 위로 검붉은 선혈이 튀었다.
하지만 반쯤 땅에 박혀 기울어있는 그 비석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수급이 멍석 밖으로 굴러떨어지며 마른 흙바닥에 처박혔다.
늦가을의 거센 바닷바람이 허물어진 설바카라 터를 가로질러 먼바다를 향해 길게 휘감아 돌았다.
부서진 목바카라의 톱밥과 잿빛 석탄가루, 그리고 메마른 낙엽 부스러기들이 바람을 타고 수평선 너머로 어지럽게 쓸려 나갔다.
빗장이 뽑혀 나간 국경 위로 왜인들의 인력거가 지나갔다.
경계 위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완결(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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