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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 서 (書)

1870년 늦여름, 동래 초량왜관

by밤톨

다음날까지 왜관 거리는 기이할 정도로 쥐 죽은듯 가라앉아 있었다.


배향대청의 문이 닫힌 뒤로, 왜관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안동준이 서안 위에 고문서 두 권을 내려놓으며 모리야마의 숨통을 틀어막은 탓이었다. 메이지의 번듯한 국서라던 종이쪽지는 왜관 문턱 한 번 넘어보지 못한 채 흑단 상자 속에 도로 처박혔고, 체면이 깎인 일본 관리들은 연일 본국으로 파발선만 띄워 보냈다.

동래부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조정의 척화령을 등에 업은 관아는 왜관으로 들어가던 쌀과 땔나무를 볏짚 한 단까지 모조리 틀어막았다.


그러나 거친 무사들의 입을 틀어막고, 왜관 전체를 기괴한 침묵 속에 가라앉힌 것은 굶주림이나 외교적 교착 따위가 아니었다.


박무혁은 남색 융복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설바카라문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어제 무너져내린 기둥은 아무런 방해 없이 오전에 다시 세워놓았다. 오히려 이러한 적막이 낯설었다.


모든 사내들의 눈빛이 향하는 곳은 오직 하나였다.

사역원 별당 뒤란, 흙담으로 둘러쳐진 비좁은 단칸 옥사.

제 발로 설바카라을 넘어 들어와 무릎을 꿇은 여인, 나카노 치즈루.

그리고 그녀의 목숨이었다.


칼을 찬 왜인들도, 창대를 꼬나쥔 조선의 수문군들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이 지독한 교착의 뇌관은 서계(書契)의 글자가 아니라, 저 방 안에 갇힌 여인의 목에 걸린 일죄(一罪)의 법도라는 것을.


폭풍이 들이치기 전 바다가 하얗게 성에를 뱉어내듯, 국경선 전체가 여인의 운명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날 오후, 초량왜관 뒷동산 용두산(龍頭山)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달아오른 숯탕 같았다.

동준은 옥색 도포 자락을 쥐어 잡고 계단을 박차듯 올라갔다.

풀숲에 숨은 늦여름 참매미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댔다. 땀과 먼지에 절은 갓끈이 목덜미를 파고들어 살갗이 쓰라렸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썩은 대나무 빗자루와 왜인들이 피우다 버린 담뱃재 냄새까지 갯바람을 타고 훅 끼쳐왔다.


동향사(東向寺) 전각 앞마당에는 흰 모래가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깔려 있었다.

바다를 향해 트인 툇마루 끝, 낡은 먹빛 가사를 걸친 가쿠잔이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파도 소리 사이로 여느때 처럼 가쿠잔은 염주 알을 탁, 탁, 건조하게 굴리고 있었다.


"스님."

동준이 댓돌 위에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목구멍 안쪽이 바짝 타들어가 피 맛이 났다.

"방법을 내어놓으시오. 쓰시마의 밀선을 사든, 절간의 승려 옷을 입히든, 칼잡이를 매수하든 상관없소. 오늘 밤 안으로 치즈루를 왜관 밖으로 빼돌려 본토의 가장 외딴 산골로 보내주시오. 은자가 부족하다면 내 사역원의 녹봉과 가산을 모조리 팔아 바닥까지 긁어모으겠소."

가쿠잔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노승은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이미 물었네…… 첫날밤…… 그 아이가 사역원 밀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무어라 하였소."

"그 아이 스스로가 형대(刑臺)에 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네."


목구멍에서 마른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체 왜요! 보령 갈대밭에서 몸에 피칠을 하며 살아남았고, 평양의 도축막에서 소가죽을 긁으며 연명한 질긴 목숨, 억울하게 찢겨 나간 가문의 명예를 밝히겠다며 이역만리에서 버텨온 여인이지 않소! 헌데 제 발로 단두대에 목을 밀어 넣겠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이오!"


가쿠잔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노승의 눈자위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그늘이 짙었다.

"그 처형이야말로…… 모리야마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비수이기 때문일세."

"……비수라니."

"안 훈도, 모리야마와 저 삿초(薩長)의 사냥개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 설바카라의 규례가 부서져 걷잡을 수 없는 난출(闌出)이 터지는 것, 혹은 굶주린 왜인이 조선 관군의 창끝에 개처럼 찔려 죽어…… 군함을 끌고 올 강력한 구실을 얻는 것 아닌가."

가쿠잔의 마른 입술이 잘게 떨렸다.

"헌데 보게나. 저들이 도륙 내어 버린 옛 막부의 명망 높은 무가의 딸이, 천년 황실의 법도를 증명하겠다며 제 발로 설바카라을 넘어왔네. 그리고 '내가 국경의 약조를 어겼으니 조선의 성법(成法)대로 내 목을 베라'며 단정히 목을 내밀고 있어. 오만한 침략의 깃발을 든 무사들의 낯짝 앞에서, 왜국의 여인이 스스로 조선의 법을 존중하며 목숨을 바치는 것이네.….. 이게 그들에게 뭘 의미하겠나?"

노승이 툇마루 바닥을 주먹으로 지그시 내리눌렀다.

"그 아이가 피를 뿌리며 죽는 순간, 왜관의 낭인들도, 모리야마도 더는 '조선이 일방적으로 신의를 깨뜨리고 우리를 능멸했다'는 명분을 입에 올리지 못하네. 조일 오백 년의 약조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제 살과 피로써 국경의 돌비석에 못 박아두려는 게야. 그 아이는 처음부터 모든 판세를 꿰뚫고 이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온 것일세."


"그따위 명분과 계산이…… 사람 목숨보다 무겁단 말이오!"

동준이 소리를 질렀다. 툇마루 기둥을 짚은 그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외교니 맹약이니 하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 숨어, 한 여인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평화를 구걸하는 짓 따위…… 사역원의 어떤 전례(前例)에도, 성인의 어떤 도리에도 적혀 있지 않소!"


동준은 가쿠잔의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았다.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돌계단을 내달리는 그의 등 뒤로, 짤랑거리는 풍경 소리와 바닷바람만이 차갑게 부서졌다.




초량에서 동래부 동헌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의 흙길은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말발굽이 지나는 자리마다 뽀얗게 일어난 흙먼지가 동준의 얼굴과 도포 깃을 허옇게 덮쳤다. 길가에 늘어선 초가집들은 촛불 하나 켜지 않은 채 죽은 듯 침묵했고,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관도(官道) 위로 말의 거친 콧김만이 규칙적으로 터져 나왔다.


동래읍성 남문을 지나 동헌 본청으로 뛰어들었을 때, 솟을대문의 횃불은 기름 찌꺼기를 태우며 매캐한 냄새를 뿜고 있었다.

동준은 장지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바카라상 위 호롱불 너머로 동래부사 정현덕이 서안에 팔을 괸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바카라상 위에는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관용 공초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부사 대감."

동준은 품속에서 흙먼지 묻은 백지 한 장을 꺼내 서안 위에 내리찍듯 내려놓았다.

"나카노 치즈루를 표류민으로 승인해 주십시오. 칠 년 전 서천포와 보령 앞바다의 조난 일지를 제가 밤을 새워 다시 맞추겠습니다. 사역원의 전례를 뒤져 흠잡을 데 없는 쇄환(刷還) 문서를 꾸며 올릴 터이니, 대감의 관인만 찍어주십시오. 만에 하나 조정에서 문바카라이 내려온다면, 오직 왜학훈도인 제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참형을 받겠습니다."


정현덕은 붓을 든 채 동준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노회한 관료의 눈빛은 우물물처럼 깊고 차가웠다.

"낮에…… 그 왜녀가 나를 독대하길 청했네."

동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치즈루가 대감을 보았단 말입니까?"

"그렇네. 의복을 단정히 여며 입고 와서 내 앞에 무릎을 꿇더군. 묻지도 않은 말을 또박또박 뱉었어. 우리말이 참 자연스럽더군."

정현덕의 손가락이 서안 모서리를 건조하게 짚었다.

"칠 년 전 대마도의 밀무역선 밑창에 숨어 홀로 설바카라을 넘었다고, 조선의 말과 글을 눈동냥으로 익혀 남포와 평양을 떠돌았을 뿐, 자신을 도운 조선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더군."

"거짓입니다!"

“나도 그 말을 믿지는 않았네.”

동준이 서안을 부서져라 짚으며 몸을 앞으로 꺾었다.

"제가 숨겨주었습니다! 칠 년 전 그 밤, 역참 마당에 쓰러진 여인을 방으로 들인 것도 소인이었고, 관아의 눈을 피해 운문사로 빼돌린 것도 다 이 소인이었습니다! 국법을 유린하고 국경을 무너뜨린 진짜 죄인은 저 여인이 아니라…… 바로 나, 나 안동준이란 말이오! 정녕 목을 벨 요량이라면 내 목부터 먼저 베시오!"


정현덕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노회한 부사의 입에서 벽력같은 호령이 터져 나왔다.

"그만, 닥치지 못할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벼루가 들썩였다.

정현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핏발 선 눈으로 동준의 미간을 쏘아보았다.

"네놈 하나 목이 잘려 나가는 것으로 끝날 일인 줄 아느냐? 사역원의 왜학훈도가 왜국 계집과 결탁하여 칠 년간 국경을 농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조정의 대원군 대감께서 사역원을 통째로 도륙 내지 않겠느냐! 대마도의 쌀길은 영원히 끊어질 것이고, 본토의 사냥개들은 이를 빌미 삼아 당장 내일 아침 부산포 앞바다에 철갑선을 들이밀 것이다!"


정현덕의 거친 숨이 서재의 창호지를 흔들었다.

부사는 옷깃을 거칠게 여미며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사정은 딱하다. 나 역시 그 아이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며 명치 끝이 저릿했어. 허나 안 훈도…… 그 계집의 목 하나가 떨어짐으로써 저 왜관의 낭인들이 칼을 도로 집어넣고, 조일 간의 파국을 단 몇 년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관원인 우리는 그 피를 밟고 서야 하는 법일세."


"대감……."


"처형은 내일 정오, 예정대로 집행할 것이네."

정현덕이 서안 위의 촛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물음이 비수처럼 동준의 정수리를 찔렀다.


"자네…… 내일 형장에서 사역원의 훈도로서, 그 아이에게 일죄(一罪)를 고할 수 있겠는가."


동준은 입술을 짓이기며 아무런 대답도 올리지 못했다. 어금니 사이로 비릿한 피 맛이 배어 나왔다.




같은 시각, 사역원 별당 뒤란의 차가운 흙방 옥사.


창살 틈새로 스며든 그믐의 달빛 아래, 치즈루는 흙바닥 위에 미동도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문풍지가 드르륵 열리고, 허름한 삿갓을 눌러쓴 늙은 사내 하나가 소리 없이 문지방을 넘었다. 북방 시모키타 반도의 눈구덩이를 뚫고, 쓰시마의 밀선을 거쳐 왜관으로 기어든 아이즈 가문의 옛 가신이었다.

사내는 피 묻은 무릎을 꿇은 채, 품속에서 소금기와 눈물에 절은 얇은 닥종이 한 장을 꺼내 치즈루의 무릎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아가씨…… 옛 영주이신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 공께서 유배지의 토굴 속에서 피눈물로 쓰신 친필이옵니다."


순간 치즈루의 숨이 멎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이 종이를 펼쳤다.

먹선은 거칠고 메말라 있었으나, 번주의 낙관은 분명했다. 단 세 줄이었다.

『雪に埋もれし刃は潔白なりしを、
我が眼暗くして忠節を斬れり。
汝の気高き誠こそ、会津の最後の魂魄なり。』
(눈 속에 묻힌 칼날은 결백하였거늘,
내 눈이 어두워 충절을 베었구나.
그대의 고결한 성심(誠)이야말로 아이즈의 마지막 넋이로다.)


종이 위로 툭,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칠 년 동안 늑막 깊숙이 박혀 있던 멸문의 죄바카라감, 아비의 시신을 뒤로하고 도망쳐 왔다는 수치심, 이국의 산천을 떠돌며 벙어리 행세를 해야 했던 처절한 비루함이 그 세 줄의 먹선 속으로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아비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자신 역시 가문을 버린 비겁한 도망자가 아니었다.


치즈루는 가타모리의 서신을 소중히 접어 가슴속 기모노 오비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찾아온 늙은 사내를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얼굴에 어리던 마지막 그늘이 씻은 듯 걷히고, 고요하고 투명한 평온만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옥사 문이 다시 열렸다.


동준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동준은 문턱을 등진 채 주저앉듯 무릎을 꺾었다. 동래 동헌에서부터 넋을 놓고 말을 몰아온 탓에 허벅지 안쪽이 찢길 듯 저려왔다. 입을 열어 무어라 소리치고 싶었으나, 혀뿌리가 바싹 말라붙어 아무런 소리도 뱉어내지 못했다.


방 안은 숨 막힐 만큼 좁았다. 바닥에 깔린 거적때기 사이로 흙내와 습한 냉기가 도포 밑단을 적셨다. 벽 모퉁이에 놓인 등롱 심지가 타들어 가며 매캐한 기름 냄새만을 뿜어낼 뿐이었다.


치즈루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동준은 차마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다. 정현덕에게 매달려 자신의 목을 베라고 발악했던 치기가, 표류민 장부를 위조해 주겠다던 그 알량한 관료적 오만이, 여인의 단정한 무릎 앞에서 한 줌의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자신은 왜학훈도라는 허울 좋은 감투를 쓰고 국경의 문자를 주무르던 자였으나, 정작 이 사지로 걸어 들어온 한 사람의 목숨 앞에서는 무력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침묵 속에서 동준이 고개를 떨군 채 거친 숨을 겨우 고르고 있을 때, 치즈루의 옷자락이 스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치즈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인은 문을 가로막고 앉은 동준의 어깨를 조용히 비껴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동준은 홀린 듯 그 뒤를 따라 걸어 나와 별당 대청마루 끝에 섰다.


저 멀리 왜관의 목바카라 너머로 검푸른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처연하게 밀려들었다.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차갑게 스쳤다.

치즈루가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칠 년 전 그 가을밤, 역관 마루에서 나으리께서 물으셨지요."

"……."

"조선인과 왜인의 차이가 무엇이냐고요."

동준의 턱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치즈루는 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넘겼다.

"이 땅을 걸으며 보았습니다. 흙 묻은 감자를 불쑥 내밀던 늙은 아낙, 행패를 부리던 건달의 팔을 꺾어주던 젊은 농부, 제 목숨을 던져 저를 숨겨준 월영각의 기생 언니, 그리고 피를 흘리며 대신 칼을 받아내던 사토 상과 말없이 길을 비켜주던 박 군관까지……."

치즈루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준을 마주 보았다. 그늘 하나 없이 투명해진 눈동자가 그믐의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빛났다.

"차이란…… 애초에 없는 듯합니다. 어디에나 도리를 아는 사람이 있고, 어디에나 제 욕망을 위해 칼을 뽑는 짐승이 있을 뿐이지요."


"낭자."

동준의 목소리가 무겁게 갈라져 나왔다.


"나는…… 내일 형장에서 그대에게 일죄를 고해야 할지도 모르오. 내 손으로 전례를 펴고, 그대의 목을 베라는 선고를 내 입으로 읊조리는 것 말이오......"


치즈루가 지긋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으리께서 해주셔야 합니다."


여인의 음성은 가늘었으나 서늘할 만큼 단단했다.

"나으리께서 당당히 그 관바카라을 펼치고 엄중히 국법을 고하셔야, 저 문밖의 낭인들도, 모리야마도 감히 이 설바카라의 법도를 조롱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제가 나으리께 남기는 마지막 청입니다."


"……."


동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소리쳐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눈은 이미 확고했다.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일임은 분명했으나, 다른 이가 그러는 것 역시 참을 수가 없었다.


동준의 마음을 헤아리듯, 치즈루가 옷깃을 여미고 마루 위에 깊이 엎드려 절을 올렸다.

"부디…… 저 메이지의 늑대 같은 자들과 타협하지 마시고, 양국의 신의와 교린을 이어가 주십시오. 제가 제 목숨으로 벌어놓을 이 몇 년의 시간을…… 부디 헛되이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이마를 마룻바닥에 댄 채 미동도 않는 여인을 내려다보며, 동준은 어금니를 악물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없는 삭막한 어둠 속에서, 국경의 바다는 지나치게 차갑고 잔인했다.




정오의 뙤약볕이 정수리 위로 바늘처럼 내리꽂혔다.

시야가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목바카라을 둘러싸고 늘어선 백여 명의 병풍 같은 인영들, 양복을 차려입은 모리야마도, 도끼를 내려놓은 낭인들도, 창대를 꼬나쥔 수문군들도 동준의 눈에는 그저 웅성거림조차 지워진 검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빨려 들어간 듯한 정적 속에서, 동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오직 발치 아래 깔린 거친 멍석 한 장, 그리고 그 곁에 피 묻은 비석처럼 우뚝 솟은 『약조제찰비』의 붉은 음각뿐이었다.


흙먼지 내려앉은 바닥 위로, 나막신을 벗어던진 하얀 버선발 하나가 천천히 디뎌졌다.

시간이 진득하게 굳어버린 것처럼 걸음걸음이 기이할 정도로 느렸다. 버석거리는 모래 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사방을 짓누르는 정적 속에서 오직 그 백색의 발끝만이 이 땅의 미련을 남김없이 털어낸 사람처럼 고요하게 앞으로 나아왔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진홍빛 기모노 자락이 백색의 뙤약볕을 받아 붉은 불길처럼 일렁였다. 그 옷단 끝을 따라 정갈하게 박힌 하얀 겨울 동백꽃 자수는 서늘한 칼날처럼 번뜩였다.

주저함도, 흔들림도 없었다. 마른 멍석을 향해 한 발, 또 한 발 거리를 좁혀왔다. 홀로 아득히 긴 귀향길을 단정히 밟아가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그녀가 멍석 위에 무릎을 꿇고 단정히 정좌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관복을 입고 얼어붙어 선 동준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손에 닿은 빳빳한 관바카라(官冊)의 한지가 동준에게 유난히 낯설었다. 손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감각조차 없었다.
숨조차 들이쉴 수 없었다.
입안 가득 고여 드는 피맛을 삼키며 바카라장을 펼쳤다. 먹줄로 쓰인 글자들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번졌다.
자신의 목구멍을 뚫고 나가는 소리가 정녕 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금표(禁標)로 정한 경계 밖으로, 대소사를 막론하고 함부로 난출(闌出)하여 지경을 넘은 자는 일죄(一罪)에 처할 일……."

바카라을 쥔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려왔다.


"죄인, 나카노 치즈루. 왜국의 여인으로서 국법을 범하고 사사로이 설바카라을 넘어 국경을 유린하였으니…… 『기유약조』와 『약조제찰비』의 성법(成法)에 따라, 일죄(一罪)에 처한다."

마지막 글자를 뱉어낸 순간, 명치 끝이 통째로 도려내지는 듯한 암담한 통증이 밀려왔다.


맞은편 목바카라 앞에 선 쓰시마 재판통사가 모리야마와 낭인들의 서슬 퍼런 눈치를 보며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뗐다. 떨리는 왜어가 쇳소리처럼 겹쳐 들렸다.

"禁標の境を越え、大小を論ぜず、みだりに闌出すれば、一罪に処すべし……."
(금표의 경계를 넘어, 대소를 논하지 않고 함부로 난출하면, 일죄에 처할 일…….)


바가지에 담긴 탁주가 허공으로 뿜어지는 비릿한 소리가 났다.

술 냄새와 쇳내가 뒤섞인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쓰시마측 망나니가 어깨를 비틀며 시퍼런 환도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든 바로 그 찰나였다.


치즈루의 투명한 눈동자가 허공에서 동준의 촛점 잃은 시선과 마주쳤다.

여인의 붉은 입술 끝이 아주 엷게 호를 그렸다.

소리 없는 입모양이 바람을 타고 동준의 망막에 깊게 박혔다.


—파억!

둔탁하고 묵직한 파열음이 정적을 갈랐다.


비석의 음각, '일죄(一罪)'라는 붉은 두 글자 위로 검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튀어 붙었다.

까마귀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사령 둘이 다가와 볏짚으로 머리채를 옭아매더니, 칠 년 전 그녀가 넘었던, 어제 제 손으로 빗장을 열어젖혔던 바로 그 설바카라문 장대 끝에 높이 꿰어 올렸다.


동준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꺼풀을 닫는 순간, 이 모든 죄업과 그녀가 남긴 몫을 놓쳐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부릅뜬 채 응시했다.


입술 안쪽을 부서져라 물어뜯은 탓에, 턱을 타고 흘러내린 검붉은 피 한 줄기가 그의 푸른 관복 깃을 붉게 적셔 내리고 있었다.




등불은 켜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더듬지 않아도 발길 닿는 곳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역관 문지방을 넘어 부엌 바닥으로 내려서자, 묵은 재 냄새와 메마른 흙내만이 혓바닥에 내려앉았다.


칠 년 전 그 가을밤에도 불을 켜지 못했다. 사령들의 순찰 소리에 가슴을 졸이며, 비에 젖은 남색 장옷을 방에 밀어 넣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놋주걱을 쥐었던 자리였다. 식은 가마솥 바닥을 긁어 한 그릇의 더운 밥과 장국을 소반에 얹어낼 때, 손끝에 닿았던 그 희미한 온기. 방 안 어둠 속에서 숨죽여 국물을 넘기던 여인의 밭은 숨소리.


동준은 무쇠 가마솥 앞에 무릎을 꺾고 주저앉았다.

설바카라 앞에서 관바카라을 부서져라 쥐고 있던 오른손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다 가마솥 뚜껑 위로 떨어졌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무쇠의 냉기는 잔인할 만큼 시렸다.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쇳덩이의 비정한 감촉이 뼈마디 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마솥의 둥근 모서리에 이마를 얹었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울음조차 되지 못한 마른 숨이 목구멍 안쪽에서 꺼억꺼억 헛돌며 가슴속을 쥐어짰다. 제 입으로 선고한 일죄(一罪)의 글자들, 허공을 가르던 환도의 번뜩임, 비석의 붉은 음각 위로 튀던 뜨거운 핏방울이 차가운 쇠붙이의 감각 위로 겹쳐졌다.


머리를 짓눌렀다.

쇠 턱의 모서리가 이마 가죽을 파고들며 둔탁한 통증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피가 배어 나오는 자리보다, 낮 동안 겨우 붙들어 맨 가슴 통증이 터지자 견딜 수가 없었다.


사내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어떤 말도, 어떤 통곡도 이미 서늘하게 식어버린 설바카라 앞 비석에서는 한 줌의 비루한 변명이었다.

차디찬 쇠붙이에 이마를 짓이긴 채, 어둠 속에서 소리없이 통곡하며 그저 깊고 긴 숨을 천천히 뱉어냈다.

이 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칠 년 전 그 새벽 가마솥에서 피어오르던 온기는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Photo by Kiriakos Verro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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