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9월 1일 새벽, 초량왜관 사역원 별당 밀실
군관들의 거친 발길질이 별당 마루를 흔들었다.
"안 훈도! 즉시 죄인을 내어놓으시오!"
동헌에서 말을 몰고 달려온 영리(營吏)가 부사의 전령을 쥔 채 문갑을 걷어찼다.
"백주대낮에 왜국 계집이 목바카라을 뚫고 왜관 안으로 들어왔소! 일죄(一罪) 조문이 시퍼렇게 살아있거늘, 어찌 관아로 압송하지 않고 사역원 별당에 가둬둔단 말이오! 정현덕 부사 대감께서 노발대발하고 계시오!"
동준은 장지문 앞에 버텨 선 채 품속에서 빳빳한 관바카라(官冊)을 펼쳐 들었다. 눈자위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음성에는 떨림이 없었다.
"이 죄인은 단순한 범월자가 아니오."
"그럼 뭐요?"
동준이 영리의 미간을 서늘하게 쏘아보았다.
"단신으로 설바카라을 넘었으되 입고 있는 것은 아이즈번 상급 무가의 정복이오. 의심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요. 왜관 안의 소요와 결탁한 배후가 있는지, 본토의 정한론자들이 밀파한 간세인지 사역원의 법례에 따라 낱낱이 '문정(問情)'을 끝내기 전에는 누구도 손댈 수 없소."
"수백 낭인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국경을 넘은 왜녀인데 무슨 문정이 더 필요하단 말이오!"
동준이 장지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일갈했다.
"배후를 캐내지 않고 성급히 목부터 벴다가, 저들이 이를 트집 잡아 군함을 끌고 오면 그 바카라임을 영리 자네가 질 텐가?"
영리는 입술만 달싹이다 마지못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사흘이오. 사흘 안에 공초(供招)를 올리지 못하면, 부사 대감께서 군포교들을 이끌고 와 문을 부술 것이오!"
마루를 울리던 군화 소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동준은 옷깃을 여미며 몸을 돌려 밀실의 장지문을 열었다.
방 안은 서늘한 묵향과 마른 기름 냄새만이 감돌았다.
어스름한 등롱 불빛 아래, 핏빛보다 붉은 진홍색 기모노를 입은 나카노 치즈루가 미동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곁에는 낡은 묵주를 쥔 대마도의 선승, 가쿠잔(覺山)이 앉아 있었다. 왜관을 뒤흔든 전례 없는 소식에, 마침 동향사(東向寺)에 머물다 한달음에 달려온 터였다.
동준은 문턱에 못 박힌 듯 굳어 선 채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등롱 불빛 아래, 단정하게 앉은 여인의 낯익은 정수리와 가녀린 어깨선이 눈에 들어왔다.
꿈결에도 몇 번이나 그리고 지웠던 얼굴이었다.
살아있었다.
그 험한 산천과 삭풍을 뚫고, 기어이 숨을 쉬며 제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명치 끝에서 울컥 차오르는 뜨거운 반가움과 아련함에 가슴이 저릿하게 내려앉았다.
손을 뻗어 당장이라도 그 차가운 손을 맞잡고, 어디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묻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그 벅찬 안도는 꺼내놓을 수 없었다.
여인의 몸을 감싼 붉은 능라와, 그 가슴팍에 꽂힌 단도. 그리고 방 밖을 둘러싸고 있는 수문군들의 서슬 퍼런 창검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살아 돌아왔다는 기쁨보다, 하필 제 발로 이 단두대의 툇마루를 밟고 들어왔다는 잔인한 현실이 폐부를 바짝 조였다. 반가움과 절망이 거칠게 뒤엉켰다. 명치 한구석을 굵은 밧줄로 동여맨 듯 숨통이 막혔다.
쉽게 안부를 묻기에는, 이 여인의 목에 걸려있는 사흘의 유예가 너무도 잔인했다.
"……조선말을 배운 게요."
"예, 나으리."
치즈루의 대답은 담담했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서툰 이국의 억양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찌…… 다시 온 것이오."
동준의 손이 본능처럼 여인을 향해 반 뼘 허공으로 들렸다가, 이내 허망하게 꺾여 내려앉았다. 타오르는 안도와 반가움을 억누르듯, 그는 제 도포 자락을 거칠게 그러쥐었다.
"내가 그대를 살려 보내기 위해 어떤 칼날 위를 걸었는지 아시오……?"
"예, 짐작하고 있습니다."
"헌데, 왜관의 빗장을 제 손으로 열고 들어왔소. 다시 걸어서 들어온 지금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오? 관아와 왜관의 눈들이 지금 이 방문 앞을 옥죄고 있소!"
치즈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매에 두려움이나 서글픈 기색은 없었다.
"빚을 갚으러 왔습니다."
"빚이라니. 내게 무슨 빚을 졌단 말이오?"
"나으리께 뿐만이 아닙니다. 조선에 빚을 졌습니다."
"자네 목숨을 이렇게 내어놓을 정도로…… 대체 그간 밖에서 무슨 일들을 겪은 거요?"
치즈루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동준을 응시했다.
"목숨을 빚지고, 온기를 빚지고, 삶을 빚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얼굴을 빚졌습니다."
여인의 결곡한 음성이 서늘한 방 안을 채웠다.
"그 빚은 저 혼자 갚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즈 가문의 마지막 피로서, 조선에 빚을 갚고 일본의 잘못된 칼날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제 목숨은 아깝지 않습니다."
밖에서 왜관 실무자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문풍지를 흔들었다.
쓰시마 측 통사들과 관수왜가 자국의 여인을 내놓으라며 문갑을 쿵쿵 두드리다 돌아가는 소리였다.
동준이 안쪽 빗장을 무겁게 걸어 잠그자, 지켜보던 가쿠잔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모리야마가 이미 본국에 치계를 올렸소. 본토의 여인이 설바카라 안에서 불법 감금되었다는 구실로, 군함을 끌고 올 핑계를 삼으려는 게요."
치즈루는 가슴팍 오비(帯)에 꽂힌 단도 대신, 품속 깊은 곳에서 손때 묻은 얇은 종이 뭉치를 꺼내 서안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나으리."
가쿠잔이 나직이 말을 보탰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치즈루는 교토에서 철저히 공가(公家)의 법도와 고문서를 익히며 자란 아이요. 지금 조일 양국 사이에 오가는 서계와 국서의 숨은 내막을 짚어내는 데 더없는 힘이 될 걸세."
동준의 시선이 서안 위에 놓인 낡은 종이 뭉치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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