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 로 (路)

1865년 2월 말, 소백산맥 산간 협곡

by밤톨

사내 하나가 마른 침을 삼켰다.

나흘째 씹은 것이라곤 바위틈에서 뜯어낸 마른 솔잎과 언 눈 덩어리가 전부였다.

"두목, 이대로는 손가락이 굳어 칼을 쥘 수도 없겠습니다."

소백산맥의 마른 삭풍이 낭인들의 뺨을 때렸다.

양산과 밀양의 경계에서 말을 버린 이래, 시노루와 겐지로를 비롯한 왜인 일곱 명은 험준한 능선만을 밟으며 북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바위 절벽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나아가는 강행군이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잔설 위로 가죽 덧댄 짚신이 버석거리는 마찰음을 냈다.

추위보다 지독한 것은 굶주림이었다.

연이은 흉년과 가렴주구에 짓밟힌 삼남의 산골 마을들은 이미 산송장의 소굴이었다. 인기척이 완전히 잦아든 인시(寅時) 어스름에 민가로 기어 내려갔으나, 헛간마다 쥐똥 섞인 먼지뿐이었다. 손톱이 뒤집히도록 옹기 바닥을 긁어내야 겨우 찾아내는 것은 마른 옥수수 낟알 몇 줌과 얼어터진 무 꽁지가 전부였다.

"산천이 온통 굶어 죽은 귀신 꼴이로군."

아이즈의 살수 하나가 피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무리의 맨 앞에 선 이나가키 시노루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앙상하게 마른 뺨 위로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하오리 자락 아래로 부딪치는 진검 두 자루. 그는 마치 굶주림조차 살기로 씹어 삼키는 맹수처럼 묵묵히 낙엽 덮인 협곡 길목을 응시했다.


마른 억새가 쓸리는 소리 사이로 기척이 섞였다.

협곡 양옆의 바위 그늘과 억새밭 뒤편에서 그림자 스무 남짓이 기어 나와 앞뒤 길목을 틀어막았다.

"거기 서라."

가래 끓는 조선말이 협곡의 찬 공기를 찔렀다.

둘러선 무리의 행색은 참담했다. 뼈가 드러난 손목에 쥔 것은 녹슨 낫과 괭이, 옹이가 거친 몽둥이였다. 짚풀로 겨우 중요 부위만 가린 해진 누더기옷, 굶주림으로 퀭하게 파인 눈구멍. 세도정치의 끝없는 수탈을 견디다 못해 산으로 기어든 화적패들이었다.

그러나 유민들의 맨 앞에 선 사내 하나는 결이 달랐다.

낡고 찢어졌으나 푸른빛이 남은 군복. 허리춤에 비스듬히 찬 것은 농기구가 아닌 날이 시퍼렇게 선 환도였다. 군영에서 칼을 쥐다 낙향했거나, 탈영해 도적 떼의 우두머리로 주저앉은 사내였다.

두목이 턱 끝으로 시노루 일행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꼴을 보아하니 어디서 굴러먹다 기어든 왜놈 부랑자들 같은데, 목숨이라도 건져 고향 바다로 돌아가고 싶거든 쥐고 있는 곡식과 패물을 털어놓아라."


사내들이 낫을 쥐며 거리를 좁혔다.

겐지로의 손이 칼집에 닿았다. 굶주려 눈이 뒤집힌 백성들이었다. 벨 까닭이 없는 목숨들이었다. 겐지로가 뒤로 한 보 물러서며 흙을 밟았다.

앞으로 걸어나오던 시노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도륙(屠戮)이다."

말은 낮았으나 칼은 빨랐다. 시노루의 몸이 앞으로 기울며 비적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품에서 빠져나온 단도가 낫을 쥔 사내의 어깨와 목 사이를 파고들었다. 피가 번지기도 전에 사내의 무릎이 꺾였다. 시노루는 쓰러지는 사내를 밀쳐내며 긴 칼을 뽑았다. 칼날이 수평으로 허공을 갈랐다.

쇠붙이가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비명이 꺾였다. 몽둥이를 치켜들었던 사내 둘이 가슴팍을 베이며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등을 돌려 달아나던 둘의 등 뒤로도 서늘한 날이 박혔다. 사내들은 흙탕물 위로 풀썩 쓰러져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피비린내가 언 땅에 번졌다. 단 다섯 번의 호흡 사이에 다섯 사람이 진흙 위에 널브러졌다. 살을 가르는 데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군더더기 없이 건조하고 정확한 칼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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