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남자에게 다른 남자와의 연애 상담을 시작했다
“자냐?”
밤 11시 8분. 같은 단톡방에 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술김에. 홧김에.
“엥?
what’s up?”
“너 여친 있어?”
“놀리냐”
아...여친은 없구나. 그럼 이 시간에 이야기해도 별문제는 없겠다.
“짜증이 나가지고
L은 전화를 안 받고”
“왜?”
“야. 남자가 너무 좋다고 만나러왔어”
“헐. 놀리냐”
한 남자가 만나러 왔다. 몇 해 동안 전화번호를 달라며 말을 걸어온 남자다. 그때마다 ‘머래’, ‘바뻐’, ‘넣어둬’라며 잘랐다.
지난 5월 갑자기 톡이 왔다. 아효. 지치지도 않는다. 갑자기 왔지만, 내용은 뻔하다. 한 번 만나잔다.
도대체
니가 왜 날?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어떤 모습에 끌렸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단다. 이건 또 무슨 논리냐고. 그걸 내가 확인시켜줘야 하나? 참 답답한 노릇이다.
그럼 니가 와서 소 사
7월에 만나기로 했지만, 그냥 지나갔다.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가고 싶었고, 바람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8월 중순쯤 왜 연락이 없냐고 묻는다. 기억하고 있었어? 이 남자는 내 번호도 모른다.
바빠서 지나갔네. 11월쯤 보자.
눈치 빠른 사람은 안다. 안 보겠다는 말인 것을.
그런데도 연락이 온다. 왜 싫으냐고 묻는다.
싫고 좋음이 없어. 그냥 관심이 없는 거야.
답하고 카톡방을 나갔다. 다시 연락이 오면 또 답하고 나갔다. 그렇게 반복하다 지쳤을 즈음, 심심한데 밥이라도 한번 먹을까 싶었다. 그렇게 10월의 어느날 만나기로 했다.
또 매일매일 온다고 카톡이 온다. 날짜가 남았잖아 그때 봐. 틈을 내준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남자는 약속한 날보다 보름이나 먼저 왔다. 우리가 얼굴을 본지 벌써 4년은 된 것 같다. 그때보다 나이 들었고, 살도 쪄서 못 알아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단번에 나를 알아봤다며 웃는다.
자기 이상형이란다. 지금까지 이렇게 좋아했던 여자는 없었고, 너에게도 내가 가장 잘 맞는 남자일 거라고 확신했다.
남자는 신발을 질질 끈다. 양복이 남자를 덮쳤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나를 만나러 오는 동안 어디로 가야 할지 검색도 안했다. 예전에 가봤던 닭 요리집에 들어갔다. 빈자리가 딱 하나 있다. 여전히 인기가 많은 식당이다. 다행이다. 마침 아시안게임 야구 경기를 하고 있었다. 시끄럽다.
남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단둘이 마주 앉아보기는 처음이다. 어색하다. 말하면서 계속 먹었다. 남자는 말이 없다. 잘 먹지도 않는다. 나 있는 쪽 닭고기만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참....이 분위기 어쩌지...
남자가 조그맣게 이야기를 꺼낸다.
옆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나와의 대화에 집중을 못 했다고 한다. 자기가 원래 예민한 성격이란다. 뭐? 이건 머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처음 말을 나누는 사이인데도 이상하게 어색함이 없다. 카톡 속 남자는 순순히 말을 들어준다. 나야 머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아이가 엄마에게 숨도 쉬지 않고 이르듯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이 시키가 집중을 못 했다는 거야. 처음 둘이 만난 거거든. 내가 이상한가?”
“밥 먹으면서 무슨 집중씩이나”
밥 먹을 때 사람한테 집중 안 하나? 그럼 뭐에 집중해? 가만가만, 집중이 어려운 거였나?
“왜 화가 나냐”
“별로네”
어?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 얘는 또 머야.
잠깐. 그 남자가 별로이긴 하지. 그런데 진짜 그래서 화가 난건가?
차 한잔하자는 말도 거절하고 서둘러 버스를 태워 보냈다.
서운했어도 할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전해졌길.
집에 다 와간다. 빨리 가서 더 이야기를 들어볼까 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이 남자의 해석이 독특하다. 두리번거리다가 가로등 밑으로 갔다. 좀 더 환한 곳이 필요하다.
“별로라 화나나?”
“화가 날게 그것밖에 없는데”
“이게 뭐야. 말과 행동이 맞아?”
다른 설명을 덧붙여 본다. 이 남자는 상황을 잘 모르니까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 걸 수도 있다. 나도 손이 빠른 편인데 글씨 쓰는 속도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아...답답하네...번호주고 전화하라고 할까? 좀 그런가. 우리가 전화까지 할 사이는 아니지. 오바야.
“뭐가 문제인 거야”
남자가 되물었다.
“이 나이에 남자 말 믿으리? 행동으로 읽는 거지.
기분이 나빠. 어떻게 집중을 안 해”
“배가 불러서 그래
맘에 안 드니까 다 싫은 거지”
계속 이렇게 간다고? 야! 나 지금 화난 건데. 왜 자꾸 그쪽으로 가. 멀 또 배가 불러. 궁하면 안 그러냐?
그런데 자꾸 생각하게 된다. 정말 그게 이유였나?
“현재 상황으론 그것밖에 없는데”
일단, 이 남자는 현재 여자가 없다. 이거 괜찮은 수확이다. 이런 용기를 낸 자신을 칭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