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긴자 하치고 ③

같은 500엔인데, 갈수록 저렴하게 느껴졌습니다

by기묘한
도쿄에서 밥 먹으며 공부합니다 — 3박 4일의 여행에서 발견한, 맛있는 한 끼 뒤의 비즈니스 이야기입니다.


슴슴하지만 디테일이 돋보였습니다


우리가 고른 건 가장 기본 메뉴인 중화소바였습니다. 닭과 오리, 생햄으로 우려낸 맑은 국물이었는데, 감칠맛이 정말 깊었습니다. 건강하고 무해하게 느껴지는 맛이랄까요.


도쿄_034_중화소바 풀샷.jpg슴슴하지만 고급스러운 맛, 기대한 만큼 긴자 하치고의 라멘은 맛있었습니다 ⓒ기묘한


의외의 킥은 함께 주문한 차슈 밥이었습니다. 안내받은 대로 국물을 살짝 부어 먹었더니 계속 입맛이 돌더라고요. 차슈는 정말 부드럽게 잘 익었고 간이 무척 절묘했습니다. 먹을수록 잘 토렴한 국밥을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요.

특히 인상 깊었던 건, 한창 식사에 몰두하던 중간쯤 슬며시 건네주신 시원한 녹차였습니다. 슴슴한 듯하면서도 감칠맛이 깊은 국물이었지만, 계속 먹다 보니 조금 느끼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거든요. 녹차 한 모금을 머금자 입안이 개운해지면서, 다시 부담 없이 라멘이 술술 넘어갔습니다. 차 한 잔을 내어 주는 순간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구나 싶었습니다.


도쿄_035_차슈 밥.jpg차슈 밥에서 오묘하게 토렴한 국밥의 맛이 느껴졌는데, 상당한 별미였습니다 ⓒ기묘한


나중에 찾아보니 이곳 라멘은 맛의 뼈대가 되는 간장·소금 양념장, 이른바 ‘타레’를 쓰지 않고 프랑스 요리 기법을 활용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평양냉면에 비유하는 이들도 있다는데, 꽤 어울리는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렬함은 덜하지만, 먹을수록 그 매력에 조금씩 빠져드는 느낌이었거든요.


맛뿐 아니라 서비스도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작은 가게인데도 제가 보기에 직원이 세 분 정도 계셨는데요. 주방에 두 분, 홀에 한 분. 좌석이 6개뿐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죠? 손님이 많지 않으니 직원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식사 흐름을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음식은 적절한 때에 맞춰 나왔고, 먹는 속도를 보며 녹차도 건네주셨습니다.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웃으며 문을 열고 닫아 주던 홀 직원분의 미소도 기억에 남고요. 여섯 자리는 예약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였지만, 이렇게 세심하게 손님을 챙길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던 겁니다.


예약 시스템도 이 작은 가게의 운영을 받쳐 주고 있었겠죠. 몇 시에 몇 명이 올지 알 수 있으니, 한정된 공간과 인력으로 식사를 준비하기가 한결 수월할 테니까요. 예약할 때는 제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점만 생각했는데,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가게의 시간도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정작 대표 메뉴는 못 먹었습니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식사는 아니었습니다. 긴자 하치고의 대표 메뉴는 따로 있었거든요. 바로 ‘라비올리 그르망디즈 중화소바’. 중화소바에 트러플과 푸아그라를 채운 프랑스식 라비올리를 얹은 메뉴로, 국물과 함께 먹으면 또 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기회만 됐다면 이걸 골랐을 텐데요. 아쉽게도 저희가 방문했을 땐 하루 30그릇 한정 수량이 이미 다 팔린 뒤였습니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늦은 시간대 예약밖에 선택지가 없었던 게 야속한 순간이었죠.


그러고 보니 예약 손님보다 먼저 식사하는 워크인 손님들에게는 이런 이점이 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을 감수한 대신, 한정 메뉴를 고를 기회가 먼저 오는 거죠. 가게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 눈에는 서로 다른 선택에 저마다의 보상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약 손님끼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야 비행기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오후 3시 반은 일반적인 점심시간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식사하기 좋은 앞 시간대를 잡으면 메뉴 선택의 폭도 넓을 수 있겠죠. 반면 저희는 늦은 시간을 택한 덕분에 숙소에서 사우나까지 즐기고 여유롭게 올 수 있었습니다. 모든 좋은 조건을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었던 겁니다.


비록 대표 메뉴는 놓쳤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500엔을 더 내고서라도 먹을 만큼 맛있었고, 그 덕분에 여행 첫날을 한결 편하게 보냈으니까요. 제가 지불한 것보다 얻은 것이 더 크다고 느꼈다면,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거리를 사러 가는 길에 우연히 긴자 하치고 앞을 지나갔습니다. 오전 9시도 채 안 된 시간인데 벌써 줄을 선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아내와 저는 예약에 성공한 덕분에 고생 없이 먹었다며 다시 한번 기뻐했죠. 솔직히 그 줄을 보니 500엔이 더욱 저렴하게 느껴졌습니다.


도쿄_036_대기줄.jpg오전 11시에 라멘을 먹기 위해 2시간 이상 대기를 선택한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기묘한


같은 금액인데도 예약할 때와 식사할 때, 그리고 아침부터 늘어선 줄을 볼 때의 느낌이 달랐습니다. 음식값 옆에 놓으면 적지 않은 수수료였지만, 여행지에서 보낼 몇 시간과 나란히 놓으니 충분히 낼 만한 돈이었던 겁니다.


상품이나 서비스에 값을 매길 때 재료와 원가만 봐서는 놓치는 것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손님은 음식을 먹기 위해 돈뿐 아니라 시간과 수고도 들입니다. 가게는 그 기다림을 관리하느라 애쓰고, 때로는 이웃과의 갈등까지 감당해야 하죠. 테이블체크는 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돈을 내고서라도 덜고 싶은 불편을 발견한 셈입니다.


놀이공원의 우선 탑승권도 비슷합니다. 같은 놀이기구를 타더라도 누군가는 기다림을 택하고, 누군가는 돈을 더 내고 시간을 아낍니다. 같은 사람도 상황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 있겠죠. 저 역시 긴자에 살았다면, 한가한 날 줄을 서 보는 쪽을 골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3박 4일 여행객인 제게는 500엔을 내는 편이 훨씬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선택을 나누는 방식이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긴자 하치고는 같은 여섯 자리를 두고, 기다릴 수 있는 손님과 시간을 아끼고 싶은 손님을 함께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파는 상품과 서비스에도 고객이 말없이 감수하고 있는 기다림이나 수고가 있지는 않을까요? 그걸 덜어 주는 일에 새로운 가치가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도쿄에 다시 가게 되고 긴자가 일정에 들어 있다면, 저는 또 긴자 하치고 예약에 도전할 것 같습니다. 못 먹은 라비올리를 한 번쯤은 먹어 보고 싶거든요. 가능하다면 이번에는 조금 이른 시간으로요.


그렇다고 줄을 서진 않을 것 같아요. 제게 그 500엔은 라멘을 먹기 위해 추가로 낸 돈이면서, 도쿄에서 보낼 몇 시간을 되찾는 돈이기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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