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행복을 고통의 부재에서 찾았다.
이 말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다양한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어린 시절에는 '행복'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단어가 가진 밝고 긍정적인 의미에 집중했다. 행복은 그저 좋은 것이었다. 기쁘고, 즐겁고, 웃음이 나는 상태. 단어의 표면에 보이는 것들이 행복의 전부인 줄 알았다.
경험이 쌓이고 삶의 방향이 다채로워지면서 단어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하나의 단어에는 눈에 보이는 의미뿐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성질도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이 없는 상태가 행복일 수 있다는 말이 비로소 와닿았다.
여전히 행복이라는 단어에는 몽글몽글함과 설렘이 있다.
"아~ 행복하다. 이게 행복이지."
이런 말은 의식해서 꺼내기보다 어느 순간 저절로 흘러나온다.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이 가진 밝은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행복을 수어를 만나면서 어떻게 확장시켰을까.
한국수어의 '행복'은 턱에 난 수염을 아래로 만지는 동작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손짓을 직접 해보며 나만의 감각을 발견했다.
웃고 있는 입가의 미소를 손안으로 가득 가져오는 것 같았다.
수어의 어원과 내가 느낀 이미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다. 나는 사람들에게 단어의 유래를 설명하고, 그 위에 나만의 해석을 덧붙인 작가노트를 들려준다.
관객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각자의 방식으로 단어를 해석한다.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기억하고, 하나의 손짓을 마음에 품어간다.
같은 단어를 배웠지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져가는 셈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좋았다.
어쩌면 이것이 타인과 행복을 나누는 나만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감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행복'이다.
가족들에게 받은 사랑에는 언제나 온기가 가득했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건네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내가 건넨 행복을 받은 사람의 표정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느끼며 살아왔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과 배경은 다르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행복이라고 부르는 장면도 제각각이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누군가 자신의 행복을 나눠줄 때 그 사람의 세계도 함께 나눠주는 것에 가깝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순간에 웃는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행복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행복의 모양보다 행복의 방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행복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의 행복을 받아들이는 순간, 잠시나마 내가 살던 세계를 벗어나 그 사람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행복을 느끼는 순간만큼은 차원을 넘어 전혀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행복'이라는 수어와 함께 존재했으면 하는 세계는 어디일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우주였다.
그렇게 <행복 우주>가 탄생했다.
하나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참 매력적이다.
누군가 건넨 행복 덕분에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만나고, 내가 건넨 행복으로 누군가의 세계가 조금 넓어진다면.
행복은 어쩌면 서로의 우주를 잠깐씩 여행하게 해주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여행을 손의 언어로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