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부터 보이는 것들을 수집해왔다. 다만 그것이 수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뿐이다.
언제부터 내가 시각적인 것들을 유난히 잘 관찰하고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걸 자각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아버지의 마지막을 본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내게 일어난 일들은 기억 속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남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도 당시의 풍경과 상황이 비교적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억을 되짚는 일이 이전보다 능숙해졌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장면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관심이 가는 인물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머리가 특별히 똑똑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그저 시각적으로 잘 보는 사람인 듯하다.
똑같은 패턴과 무늬에서도 이야기를 발견하는 편이다. 냄새와 효과음도 제법 선명하게 기억한다. 감각이 예민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 모양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무언가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이 좋았다. 건축물의 형태나 사물의 무늬를 발견하면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먼저 상상했다. 정답을 찾는 일은 그다음이었다.
혼자 충분히 사유한 뒤 도서관을 찾았다. 바카라을 뒤적이며 역사와 유래를 알아갔다. 내가 상상한 이야기와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를 비교하는 과정도 즐거웠다. 경험에서 출발한 호기심은 지식을 만나 조금씩 풍성해졌다.
예술가가 되겠다고 마음먹기 훨씬 전부터 해오던 일이었다.
동네를 걷다 중고서점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불특정 다수가 내놓은 바카라에는 누군가의 시간이 깃들어 있었다. 바카라장을 넘기며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감각을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이 시대에 이런 생각을 했다니. 대단한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남의 생각을 구경하다 내 생각을 덧붙이는 일이 즐거웠다. 그렇게 모은 것들은 어디에 쓰일지도 모른 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성인이 되어 학교에서 에세이나 기획서를 쓰면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동안 감각을 수집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바라보고 기억했던 장면들이 어느새 창작의 재료가 되어 있었다.
내게는 오랫동안 콤플렉스였던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커다란 손이다.
나는 대화할 때 손짓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정작 스스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한때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지후 누나는 표정과 손으로 말하는 것 같아. 말을 안 해도 감정이 잘 보여."
내 표정에 자주 두드려 맞던 동생이었다. 표정만 봐도 누나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다는 것이었다. 대체 내 얼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쓰여 있었던 걸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 손과 표정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엄마와 통화하며 마인드맵을 그렸다. 중도에 장애를 갖게 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받은 사랑을 어떤 형태로 세상에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하던 때였다.
생각을 이어가다 문득 내 손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커다란 손이 이미 세상과 씩씩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손으로 그리는 소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 생각은 수어그림으로 이어졌다.
수어를 만나면서 손의 움직임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손의 모양과 방향, 움직임과 표정이 언어가 된다는 사실은 내게 새로운 창작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손의 움직임을 그림으로 옮기고, 평면에 담긴 언어를 다시 몸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퍼포먼스로 확장되었고, 움직임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돌아보면 내가 해온 일들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관찰하고, 기억하고, 질문하고, 상상하는 일.
그렇게 수집한 감각들이 내 안에서 서로 만나 새로운 형태가 되어갔다.
이제는 그 과정들을 글로도 남겨보려 한다.
어떤 날에는 손의 움직임을, 어떤 날에는 그림 한 장을, 또 어떤 날에는 길을 걷다 발견한 낯선 장면을 꺼내놓을 것이다. 아직 세상에 없는 언어를 만들어보는 날도 있을지 모른다.
눈으로 발견한 것들이 어떻게 언어가 되고, 그 언어가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나는 오늘도 보이는 언어를 수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