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

by김정

밤새 내리고 아침까지 오는 비의 양이 엄청나다.

경보음과 함께 긴급 재난 문자가 여러 번 알림 되니 “상황이 가볍지 않구나.” 하고 생각되었다. 자동차 와이퍼 3단을 놓아도 차 유리창 앞에 떨어지는 비의 양과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앞 차 불빛에 의지해 기어가듯 했다. 날씨로 출근길이 역대급으로 어려웠다.


전국적으로 내린 비가 어마어마해서 빗속을 뚫고 출근한 회사 동료들과 오전 내내 수다 타임을 가졌다.

“ 빗소리보다 재난 알림 문자가 더 시끄러워 잠을 설쳤다.”

“ 천둥번개 소리에 강아지가 짖어서 무슨 일 나는지 알았다.”

그런데 시골에 혼자 계신 엄마는 뜻밖에 안녕한 소식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우선은 깊이 잠이 들어 비가 그렇게 많이 오는지 몰랐다고 하셔서 다행이었다.

“ 텃밭에 열무가 손가락만큼 올라와서 예쁘다고 보고 있었는데, 그 망할 큰비가 와서 열무를 다 잡아먹었네. 다 녹아서 볼 수가 없어”라고 하신다.

“ 어린 열무 솎아서, 된장 바글바글 끓여서, 고추장 넣고 썩썩 비비면 여름 입맛 없을 때 맛있게 먹는데….”


어제 내린 비는 여러 가지 서사를 남겼다.

이건 또 뭔지, 오늘 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맑은 햇빛과 구김살 없는 하늘을 보니 배신감이 든다.

인생은 이런 건가? 죽일 듯 비 오는 날도 있고, 비 갠 날도 있고.

엄마가 전화하셨다.

“ 열무 심었는데, 주말에 와서 열무 뽑아서 어린놈은 밥 비벼 먹고, 큰 놈은 김치 담아가라.”

큰비가 와도 분명한 건 비는 갠다는 것이다. 열무 심고, 큰비에 녹고, 다시 씨 뿌려 심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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