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법 (2) - 작가의 태도

by김옥미

한동안 나는 글을 쓴다는 것이 나를 증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 순간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누군가에게 납득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지나온 일을 빠짐없이 적으려 했다.

사건의 순서를 맞추고, 기억 속의 말을 복원하고, 누가 옳았으며 누가 잘못했는지를 밝히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모아 놓은 기억이 언제나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분명했지만 인물은 움직이지 않았고, 고통은 생생했지만 이야기는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나는 그제야 사건을 기록하는 것과 작품을 쓰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임을 알았다.


작품에 필요한 것은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그 일을 지나며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발견이었다.

나는 무엇을 견뎠는가. 무엇이 두려워 도망쳤는가.

왜 떠나야 할 때 머물렀고, 붙잡아야 할 때 놓아 버렸는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을 통과한 뒤, 나는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 질문 앞에 서면 지나온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

과거는 더 이상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정리된 연대기가 아니다.

같은 욕망을 반복해서 좇고, 같은 두려움 앞에서 번번이 물러섰던 나의 습관을 발견하는 지도가 된다.

서로 무관해 보였던 기억들이 하나의 무늬로 연결되고,

그제야 나는 내 삶에서 되풀이되어 온 욕망과 회피의 방식을 알아보게 된다.


작가는 인물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어제와 다른 선택을 하라고,

가장 두려워하던 것과 마주하라고,

끝내 넘지 못했던 경계를 넘으라고 인물을 몰아붙인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을 넘어섰는지 알지 못한다면,

인물의 변화 역시 머릿속에서 만든 관념에 머물기 쉽다.

인물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작가가 정해 둔 결말을 향해 이유 없이 걸어간다.

사건은 끝났지만 우리는 그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믿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의 한계 앞에 서 본 작가는 안다.

사람이 변하기 직전까지 얼마나 오래 망설이는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내는지,

견디는 것과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지를 안다.

결심했다고 곧바로 행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한 번의 선택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인물의 망설임을 서둘러 없애지 않는다.

그가 도망칠 시간을 주고, 변명할 기회를 주고, 이전의 선택을 되풀이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더는 물러설 수 없는 한순간을 끝내 그의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 순간 인물이 내리는 선택에는 작가가 자신의 삶에서 얻은 감각이 스며든다.


작가가 인물에게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나누어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두려움 앞에서 흔들렸던 기억, 끝까지 견디다가 마침내 움직였던 순간의 감각을 빌려준다.

작가가 통과한 내면의 변화는 인물이 변화하는 장면을 설계하는 힘이 된다.


극작가는 갈등을 다루는 사람이다.

어떤 인물은 배트맨과 조커처럼 자신과 정반대의 신념을 가진 상대와 맞선다.

장 발장은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슬롯와 싸우고,

선장은 자신을 삼킬 듯한 바다와 대결한다.

오이디푸스는 신이 내려놓은 예언을 피하려 하고,

햄릿은 행동해야 한다는 의지와 행동할 수 없다는 망설임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상대가 사람이든 슬롯든 자연이든 운명이든, 모든 갈등은 결국 인물의 내부로 들어온다.

조커를 쓰러뜨리는 일보다 조커와 싸우며 자신이 무엇으로 변해 가는지를 견디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

슬롯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것보다 그 슬롯가 자신에게 새겨 놓은 수치심을 벗어나는 일이 더 힘들 수 있다.

거대한 파도와 싸우는 동안에도 인물은 포기할 수 없는 집착과 싸워야 하고,

정해진 운명에서 달아나는 동안에도 자신의 오만과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과의 갈등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이다.

특별한 배경도, 거대한 사건도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쉬워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은 마음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에서는 가장 어렵다.

쉬운 길이 오히려 가장 험한 길이 되고, 가장 험해 보이는 길이 작품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 된다.


내가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를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마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서사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절망이 오래도록 되풀이되는 주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희망이 평생의 질문이 된다.

사람마다 펼쳐 놓을 수 있는 삶의 그릇이 다르고,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고통과 기쁨도 다르다.

다른 사람의 그릇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것을 외면한다면, 가장 절실하게 써야 할 이야기를 놓치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거나 아름답게 꾸밀 필요는 없다.

관객에게 억지로 이해받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자신조차 피해 다녔던 감정 앞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

관객이 작품에서 눈을 돌리지 않게 하는 힘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작가가 끝까지 외면하지 않은 진실에서 나온다.

그 진실을 정확히 바라본 작품은 관객에게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스스로 다가와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그 안에 겹쳐 보게 한다.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는 일 역시 작가에게는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쓰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피해 왔는지 발견하고,

끝내 쓰지 못했던 장면을 완성하고, 작품을 시작하기 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바카라상에서 일어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작품이 작가 자신의 내면에 작은 변화라도 남겼다면, 그 변화는 인물의 선택 속에도 흔적으로 남는다.

그때 작품은 더 이상 나를 증명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나를 통과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된다.

작가가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선택의 구조는 인물의 운명이 되고,

인물의 변화는 다시 관객의 삶을 비춘다.


작품의 진실함은 작가가 얼마나 특별한 삶을 살았는가에서 생기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정직하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발견한 변화를 끝까지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했는가에서 비로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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