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법 (1) - 작품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by김옥미

작품을 쓰기 위해 바카라상 앞에 앉을 때마다 나는 가장 먼저 ‘나’에게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내 삶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무대 위에 옮기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했던 일, 어떤 관계에서 도망쳤던 일,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한 편의 희곡이 되지 않는다.

삶은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재료를 늘어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들여다보려는 것은 사건보다 그 사건 속에 있던 나의 마음이다.

나는 왜 그 사람을 그토록 오래 미워했을까.

그 미움이 사라지면 내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움이라는 단단한 껍질 안에 감춰 둔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나는 왜 이전과 같은 선택을 되풀이했을까.


이런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삶에서 벌어진 하나의 사건은 인물의 운명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나의 경험은 더 이상 ‘누군가를 미워한 일’에 머물지 않는다.

미움을 붙잡고 있어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태어나고,

그 미움 속에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숨긴 인물이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과 마주하고,

평생 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선택 앞에 선다.

작가는 바로 그 순간을 붙잡아 인물의 삶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나를 돌아본다는 것은 감상적인 고백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내 삶에서 반복되는 무늬를 찾는 일에 가깝다.

나는 어떤 순간마다 도망쳤는가. 무엇을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척했는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누구를 탓했는가. 두려움을 합리화하기 위해 어떤 말을 만들어 냈는가.

결국에는 무엇을 선택했고, 그 선택 이후 나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 질문들에 정직하게 답하다 보면

‘나’는 작품에 가져다 쓸 사적인 재료가 아니라 작품을 움직이는 하나의 원리가 된다.

인물의 욕망과 그 욕망이 뒤틀리는 방식, 마침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사건,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던 선택, 그 선택으로 인한 내면의 변화가

모두 내가 삶을 통과하며 발견한 감정의 구조에서 시작된다.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 삶이 그다지 극적이지 않은데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러나 삶을 바꾸는 순간이 언제나 거대한 사건의 얼굴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긴 머리를 고집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짧게 자를 수 있다.

매일 같은 버스를 타면서도 기사에게 한 번도 인사를 건네지 않던 사람이

그날은 문득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

비 오는 날, 자신의 어깨가 젖을 것을 알면서도 낯선 사람에게 우산을 건넬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행동처럼 보이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오래된 자신을 거스르는 선택일지 모른다.


나는 그런 순간을 믿는다.

겉으로는 작은 행동이지만, 그 안에서는 한 사람이 지금까지의 자신과 결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를 자르기 전까지 무엇을 망설였는지, 인사를 건네기까지 어떤 두려움을 넘어야 했는지,

우산을 내어 준 뒤 젖은 채 걸어가면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바라보면 그곳에도 분명 한 편의 이야기가 있다.


희곡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느냐가 아니다.

갈등 속에서도 한 인물이 이전과 다른 선택에 이르는가,

그 선택을 통과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인물이 전과 같은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무대 위의 인물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

거대한 승리를 얻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자신의 변화를 인정받지 못한 채 다시 평범한 하루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늘 피해 왔던 선택을 했다면, 그의 일상은 이미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작품은 바로 그 미세한 균열에서 시작된다.

어제까지 하지 못했던 일을 오늘은 해 버린 순간,

끝까지 붙잡고 있던 감정을 마침내 놓아 버린 순간,

자신도 몰랐던 욕망을 인정한 순간.

나는 내 삶 속에서 그런 순간들을 찾아 인물에게 건넨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을 그대로 복제하는 대신 자신을 통과해 인물을 만든다.

나의 삶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삶에서 발견한 욕망과 회피와 선택의 구조를 다른 사람의 운명으로 바꾸어 놓는다.


결국 작품은 ‘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무대 위에 도착했을 때에는 더 이상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같은 두려움 앞에서 망설여 본 사람, 같은 욕망을 숨겨 본 사람,

이전과 다른 선택을 꿈꾸어 본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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