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품위 없는 인간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

(26.07.30)

by김옥미

- 폭력의 문법과 상처 이후의 생존에 관하여


나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폭력이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 문법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피와 뼈〉, 〈올드보이〉, 〈아가씨〉, 〈마티 슈프림〉,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 이 작품들은 인간을 깨끗하게 세탁한 뒤 관객 앞에 내놓지 않는다. 욕망과 수치, 사랑과 지배, 의존과 배신, 생존과 파괴가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그런 인물들에게 품위가 없다고 말하고, 그들의 세계를 오래 바라보는 일 자체가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게 그 불편함은 작품을 거부해야 할 이유라기보다 인간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만드는 질문에 가깝다.


오래전 나는 이렇게 썼다.


“내가 모순을 좋아하는 이유는 답이 없고 당황스럽고 불편하고 그 자체가 답이며 명쾌하고 편안하기 때문. 모순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문장은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오래된 문장이다. 내가 작품에서 찾는 것은 한 인간 안에서 상반된 힘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못한 채 함께 존재하는 상태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살고 싶어 하면서 자신을 파괴하며, 누군가를 구하려다가 그 사람의 삶을 빼앗기도 한다. 나는 그 모순을 정리해 주는 작품보다, 모순이 끝내 정리되지 않는 작품을 더 신뢰한다. 현실의 인간은 그렇게 매끈하게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 작품들에서 느끼는 것은 가학적인 쾌감이 아니다. 나는 인간의 추악함을 구경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피와 뼈〉의 김준평은 제주에서 오사카로 건너가 악착같이 살아남고, 그 생존의 힘으로 자신만의 질서와 세계를 만든다. 그러나 그 힘은 아내와 자식, 노동자를 지배하는 폭력으로 향한다. 영화는 그가 차별과 궁핍을 겪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면죄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역사의 피해자였던 사람이 사적인 관계에서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결핍이 반드시 연민이나 선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끝까지 남겨둔다.


〈마티 슈프림〉의 마티도 다른 방식으로 같은 모순을 품고 있다. 아무도 자신의 꿈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믿는 그는 위대해지기 위해 질주한다. 그의 재능과 집념은 매혹적이지만, 그 열망은 차츰 타인을 밀어내고 소모해도 된다는 자기 정당화로 변한다. 관객은 그의 에너지에 휩쓸리면서도 그를 온전히 좋아하기 어렵다. 열등감과 나르시시즘, 절박함과 오만함, 생의 의지와 파멸감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타락은 날아오르는 것보다 아무래도 더 깊이가 있으니까요”라고 썼다. 이어서 “살면서 하늘보다는 바닥을 더 많이 마주치기도” 한다고 적었다. 이 말은 타락을 찬양한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추락하는 순간에 자신이 감추어온 허기와 공포, 비겁함과 욕망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뜻에 가깝다. 나는 날아오르는 인간보다 바닥에 닿은 인간이 더 고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바닥에서는 그가 무엇을 딛고 있었는지, 누구를 밟고 있었는지, 무엇을 붙잡고 싶어 했는지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내가 끌리는 것은 결국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폭력이 인간의 다른 감정들과 분리되지 않은 채 작동하는 방식이다. 사랑은 언제나 폭력의 반대말이 아니다. 때로 사랑은 폭력이 통과하는 가장 은밀한 통로가 된다. 보호한다는 말이 통제가 되고, 필요하다는 말이 소유가 되며, 구원하려는 마음이 상대의 삶을 대신 결정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피해를 입은 사람도 분노하고 욕망하며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고, 가해자는 현실 밖에서 온 괴물이 아니라 가족과 조직과 예술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일 수 있다. 그렇다고 선악의 경계를 지우거나 바카라임을 나누자는 뜻은 아니다. 복잡성을 인정하는 일과 바카라임을 흐리는 일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나는 이 모순을 사랑하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나의 에세이집에는 다음과 같은 자기비판이 남아 있다.


“어떤 악인에게서든 선함을 집어내고 비극 속에서도 희극을 보고 성스러운 장소에서 세속을 목격하는 그런 시선.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모순적 관점에 도취된 나는 기이한 자학과 착취 관계를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악연에서 미래를 도출하고, 폭력에서 애정을 발견하려 하고, 피해자에게서 잘못을 파악해내려 하는 식.”


모순을 보는 눈은 폭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지만, 폭력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가해자에게도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과 그가 바카라임져야 할 폭력이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피해자에게도 모순과 결함이 있다는 사실은 피해의 바카라임을 피해자에게 돌릴 근거가 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사정을 물어 면죄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유와 바카라임을 함께 놓고,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지우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자신이 복수를 선택한다고 믿지만, 그가 따라가는 단서와 만나는 사람, 사랑하게 되는 관계까지 이미 이우진이 설계한 복수극 안에 놓여 있다. 이 영화의 폭력은 15년의 감금이나 복도에서의 난투, 마지막의 신체 훼손에만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폭력은 한 사람의 시간과 기억, 욕망과 선택을 타인의 각본 속에 가두는 데 있다. 오대수는 명백한 피해자이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의 복수에 이용되어 또 다른 폭력에 연루된다. 그 복잡성은 가해 바카라임을 대칭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판을 설계했고, 누가 선택권을 빼앗았는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가해자를 괴물로만 만들면 우리는 폭력을 몇몇 비정상적인 존재의 문제로 격리하게 된다. 그러나 가해자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속한 가족과 조직, 욕망과 제도가 어떻게 폭력을 가능하게 했는지까지 물을 수 있다.


〈아가씨〉는 폭력이 반드시 거칠고 누추한 얼굴로만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코우즈키의 저택에는 값비싼 바카라과 정교한 예법, 아름다운 정원과 세련된 낭독회가 있지만, 그 정갈한 세계의 중심에는 히데코의 몸과 목소리를 남성들의 욕망을 위해 반복해서 전시하는 폭력이 있다. 겉으로 가장 품위 있어 보이는 공간이 실은 가장 비인간적인 극장이 되는 셈이다. 숙희와 히데코 역시 처음부터 순수한 구원자로 만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속이기 위해 접근하고, 각자의 생존을 위해 상대를 이용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남자들이 써놓은 각본을 서로의 시선으로 다시 읽고, 자신들을 가두었던 서재를 파괴하며 이야기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이때 존엄은 흠 없는 순결에서 생기지 않는다. 자신이 속였고 속았다는 사실까지 끌어안은 채, 더는 타인의 목적을 위해 살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데서 생긴다.


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조울증과 PTSD를 진단받아 오랫동안 치료를 이어가고 있으며, 미성년이던 때에는 나보다 스물네 살 많은 극단 대표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나는 이 문장들을 작가로서의 자격증처럼 내세우고 싶지 않다. 고통이 예술가를 만든다는 낭만적인 공식도 믿지 않는다. 진단명이 작품을 써주지 않았고, 상처가 장면을 대신 구성해준 적도 없다. 나를 다치게 한 사건들이 저절로 희곡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 대사와 침묵, 사물과 행동으로 다시 배열했을 때 비로소 작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 경험들이 내가 세상을 감지하는 방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의 폭력을 떠올리며 이렇게 기록한 적이 있다.


“아빠가 엄마를 때릴 때 난 알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 드라마를. 내가 이 액션을 하면 저 액션으로 돌아오고… 이 화목하고도 잔인한 가족의 구조는 때로 얼마나 끔찍한 놀이인가.”


아이였던 나는 폭력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폭력의 반응을 체득했다. 어떤 말 뒤에 어떤 고함이 오고, 어떤 침묵 뒤에 어떤 폭발이 오는지 몸으로 배웠다. 폭력이 친숙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안전해서 편안한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봐서 해독할 수 있으므로 덜 낯선 것이다. 누가 선의를 앞세워 바카라임을 피하는지, 누가 상대의 두려움을 사랑으로 번역하는지, 누가 침묵을 가족의 평화라고 부르는지 나는 비교적 빨리 감지한다.


나의 또다른 문장, “평화가 익숙치 않은 삶은 전쟁을 일상으로 체험한다”는 고백 역시 같은 부분에 해당한다. 평화가 오히려 낯설고, 위기가 익숙한 몸은 고요한 순간에도 다음 폭발을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폭력이 선명한 작품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 세계는 적어도 폭력이 없다고 거짓말하지 않는다. 위험의 방향을 숨기지 않고, 인간이 얼마나 비겁하고 모순적인지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익숙함은 결코 동의가 아니다. 예술 속 폭력을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의 폭력을 견뎌야 할 의무로 바뀌어서도 안 된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위험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이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가해를 용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내게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지는 타인에게 상처받고 거절당하는 일을 견디지 못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 자체가 사라지는 세계로 끌려간다. 인류보완계획은 외로움과 오해가 없는 구원을 약속하지만, 그 대가는 각자가 서로 다른 존재로 남을 권리의 소멸이다. 신지가 끝내 돌아가기로 선택한 곳은 상처가 사라진 낙원이 아니라, 다시 타인을 만나고 다시 거절당할 수 있는 분리된 세계다. 마지막 해변에서 친밀함과 공격성이 한 장면 안에 겹쳐지는 순간은 관계를 아름답게 봉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상처받을 가능성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가능성 속에서도 타인을 지워버리지 않는 일임을 잔혹할 만큼 선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끌리는 것은 그 장면의 파괴성이 아니라 고통 없는 관계라는 환상을 거부하는 태도다.


현실의 폭력에는 프레임이 없었다. 언제 시작될지, 언제 끝날지, 어디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내가 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술에는 장면의 입구와 출구가 있다. 조명이 켜지고 꺼지며, 누가 말하고 누가 침묵할지를 배열할 수 있다. 관객인 나는 작품에 들어가고 나오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고, 작가인 나는 사건의 순서와 인과, 폭력 이후에 남을 후과를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을 곧바로 치유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실에서 사건의 대상이었던 내가 무대에서는 시간과 목소리와 사물을 배치하는 사람이 된다는 변화는 분명하다. 폭력을 재현하는 일은 내가 잃었던 주도권의 일부를 형식 안에서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언젠가 작가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작가는 ‘보아야’ 한다.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할 지라도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흔들리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 작가라면 멀미를 감수해야 한다. 멀미를 자처해야 한다.”


지금도 나는 작가가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본다’는 말은 고통을 오래 응시할 권리를 뜻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떤 거리에서 보고, 누구의 몸을 장면의 재료로 사용하며, 그 장면 뒤에 누구의 시간을 남겨둘 것인지 바카라임지는 일까지 포함한다. 응시는 권리가 아니라 바카라임이어야 한다. 폭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작품이 정직해지는 것은 아니다. 폭력의 충격만 남고 그 이후를 살아야 하는 사람의 시간이 삭제된다면, 그 작품은 폭력을 비판하는 척하면서 다시 고통을 소비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품위’라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품위에는 적어도 두 가지 뜻이 섞여 있다. 하나는 단정함과 절제, 예의와 세련됨을 가리키는 예법적 품위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인간도 타인의 목적을 위한 도구나 볼거리로만 취급하지 않는 존엄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의 인물들은 첫 번째 의미의 품위를 자주 잃는다. 그들은 비겁하고 음란하며 잔인하고 자기모순적이다. 그러나 인물에게 예법적 품위가 없다는 사실과 작품에 윤리적 품위가 없다는 사실은 같지 않다.


작품의 품위는 인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그의 추악함을 자극적인 볼거리로만 소비하지 않고, 그가 한 일의 결과를 지우지 않으며, 그에게 상처 입은 사람의 시간과 목소리를 남겨두는 데 있다. 피해자를 언제나 순결하고 고결한 존재로 만들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 피해자는 고통을 겪었다는 이유로 성인군자가 될 의무가 없다. 피해자를 한 가지 표정으로 고정하지 않을 때, 그는 비로소 사건의 증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는다.


미투 운동을 지난 뒤 나는 “예술은 인간적 바카라임이며 예술의 현장은 도덕적 바카라임을 담보로 한다. 인간에 대한 존중 없이는, 예술은 존중 받을 수 없다”고 썼다. 이 문장은 지금도 나의 가장 분명한 기준이다. 동시에 나는 “강간은 강간이다. 내가 보고싶지 않다고 해서, 내가 불편하고 불쾌하고 괴롭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도 썼다. 두 문장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폭력을 지운다고 윤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며, 폭력을 드러낸다고 저절로 윤리적인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유무가 아니라 재현하는 시선의 바카라임이다.


그러므로 ‘불편하다’는 감정은 작품에 대한 최종 판결이 아니라 질문의 시작이어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불편한가. 작품이 내가 외면해온 현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불편한가, 아니면 취약한 몸과 고통을 쾌락적인 이미지로 소비하기 때문에 불편한가. 불편함 자체가 예술적 성취를 보증하지도, 윤리적 결함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불편함을 누가 만들고, 누구의 시선으로 보게 하며, 고통 뒤에 누구의 삶을 남겨두는가이다.


〈체크메이트〉는 내가 고통을 다루는 태도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자기비판의 작품이다. 체스말은 석영에게 고통을 드라마틱하게 완성해야만 삶이 가치 있다고 속삭인다. 상담사는 그 판에 들어가지 않고 말한다. “석영 씨. 살아있어줘서 고마워요, 그 이상의 드라마는 없어요.” 석영은 되묻는다. “드라마티스트가 아니어도 난 살아갈 가치가 있나요?” 이 질문은 내게도 향한다. 고통이 작품이 되지 않아도 그 시간은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드라마가 완성되지 않아도 나는 살아도 되는가. 작품의 마지막에서 석영은 주변의 색과 숨소리, 바람 소리를 감각한 뒤 “나, 지금 여기에 있어요”라고 말한다. 거대한 극적 완성 대신 현재에 머무르는 이 문장은 내가 오랫동안 찾아온 생에 대한 의지이자 생존의 방법론이다.


나는 이미 2019년에 “희곡은 일상에서 시작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썼다. “대단한 무언가를 해내거나 결심하거나 변화한다기보다는 돌아갈 일상을 만들고 관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썼다. 이후에는 “드라마는, 결국, 정체성과 자아를 자각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선택이며, 그 선택 자체에 대한 유희나 쾌감보다도 그 선택에 의한 운명과 대단원을 감당하는 인물의 서사에 달려 있다”고 다시 정리했다. 나의 작품론은 여기에서 이어진다. 극적인 선택은 인물을 빛내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그 선택 이후의 삶을 감당하게 만드는 시작이어야 한다.


이런 창작 태도를 나는 ‘잔혹한 휴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잔혹함은 가학성이 아니라 인간을 미화하지 않으려는 엄격함이다. 인간은 선하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 아니다. 망가지고 비겁하며 모순되고, 때로 타인을 해친 뒤에도 그의 선택과 바카라임, 변화의 가능성을 인간의 세계 안에서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존엄의 문제가 시작된다. 깨끗한 인간만 사랑하는 휴머니즘은 윤리라기보다 위생에 가깝다. 나는 추악함을 지워야만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동시에 추악함을 강렬한 이미지나 쾌감으로 소비하는 시선 역시 경계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을 면죄하는 시선도, 단숨에 처형하는 시선도 아니다. 그가 한 일을 끝까지 보되, 그를 그 한 가지 행위로만 축소하지 않는 시선이다. 〈피와 뼈〉가 김준평을 끝내 구원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욕망과 생의 힘을 외면하지 않고, 〈올드보이〉가 피해와 가해가 얽힌 복수의 구조를 파국까지 밀어붙이며, 〈아가씨〉가 타인의 각본에서 벗어나는 두 여성의 선택을 보여주고, 〈마티 슈프림〉이 한 인간의 재능과 독선을 동시에 붙잡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상처 없는 합일보다 상처받을 수 있는 개별성을 택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인간의 모순을 해소하지 않은 채 무대 위에 남겨두고 싶다.


아마 나는 폭력의 문법을 먼저 배운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쓰고 싶은 것이 폭력의 문장만은 아니다. 폭력이 한 사람의 몸과 관계와 언어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 흔적을 안고도 어떻게 다음 문장이 시작되는지를 쓰고 싶다. 품위는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단정하게 덮는 일이 아니다.


나는 인간의 추악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추악함이 있다는 이유로 인간을 폐기하는 시선을 거부한다. 내가 좋아하고 쓰고 싶은 작품은 인간을 면죄하지도, 단순히 처벌하고 끝내지도 않는다. 그가 저지른 일을 끝까지 보면서도 그를 한 가지 사건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폭력의 장면이 아니라, 그 장면 뒤에서도 삶이 끝내 밀어 올리는 생존의 문장이다. “나, 지금 여기에 있어요.” 그 문장을 말할 수 있는 한, 이야기는 폭력에서 끝나지 않는다.


참고자료


연극


<체크메이트>, 김옥미 작/연출, 2021/22/25


영화


〈피와 뼈〉, 최양일 감독, 2004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 2003

〈아가씨〉, 박찬욱 감독, 2016

〈마티 슈프림〉, 조시 사프디 감독, 2025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아키·츠루마키 카즈야 감독,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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