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는 질문 앞에서 헤매던 나.
기상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휴대전화를 찾는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화면을 켰다. 메시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오랜만이네요. 휴가 중인가요?"
올해 초 연락을 나눈 뒤 먼저 건네받은 안부였다.
안부를 전하는 사람은 늘 나였다.
잘 지내냐고 먼저 묻고, 계절이 바뀌면 연락을 하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카드를 보냈다. 연락이 끊기지 않도록 애쓰는 일이 관계를 이어가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다.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한국에 있어 연락을 하려면 시차부터 계산해야 했고, 지금 전화해도 괜찮을까. 혹시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그렇게 한 번 더 망설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았다.
왜 먼저 연락하지 않았냐고 묻지는 못했다. 누구에게나 삶이 있고, 관계에도 각자의 시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조금이라도 좁히려 애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긴 사람들도 있었다.
예전에는 이유를 찾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떻게 하면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는지를.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유를 찾는 일을 멈췄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이어지지 않는 관계라면, 그 또한 그 관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다시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억지로 이어 가지도 않는다. 연락이 닿지 않는 거리를 애써 좁히려 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나만큼의 마음을 기대했다.
내가 안부를 묻는 만큼, 나를 떠올려 주기를 바랐고, 내가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상대도 같은 마음이기를 바랐다. 그 마음은 애정이었지만, 결국 내 기준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한국도, 캐나다도 아닌 어디에서든 혼자 잘 지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이제야 나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관계 속에서 상대를 바라보느라 놓쳤던 나의 마음을, 조금씩 들여다보고 있다.
쉽지 않은 일들 앞에서도 조금은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침에 메시지를 보낸 지인이 긴 메시지 끝에 이런 말을 남겼다.
"멀어지다가도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가도 멀어지고. 그냥 애쓰지 말고 자연스럽게 지내면 좋지 싶어요."
예전의 나는 그런 관계를 인정하지 못했다.
관계에도 분명한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가까운지, 멀어진 것인지, 끝난 것인지. 흐르는 상태로 두는 일은 어쩐지 불안했다. 그래서 멀어진 관계 앞에서는 언제나 '왜'라는 질문을 붙잡고 있었다. 답을 찾으면 마음도 제자리를 찾을 거라고 믿었다.
아직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관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다만 예전처럼 모든 관계에 서둘러 의미를 붙이려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야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바라보던 시선이 조금씩 나를 향하기 시작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