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 인감과 OTP 카드를 넘겨주고 나니 얹힌 밥이 내려간 것처럼 속이 뻥 뚫렸다. 내 제국의 금고 열쇠를 타인에게 쥐여주었다는 불안감보다, 이제 지긋지긋한 숫자 싸움과 행정 처리에서 해방되었다는 해방감이 훨씬 컸다. 나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무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개발팀 연구실에서는 GP4의 연산 속도를 올리기 위한 토론이 한창이었고, 그 활기찬 소음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진짜 자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복도를 걸어가며 직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내 얼굴에는 오랜만에 진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바로 그때, 복도 모퉁이 그늘진 곳에서 서성거리던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아섰다.
지난달에 경영지원팀의 막내로 입사한 정 사원이었다. 아직 대학의 때를 벗지 못한 앳된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연신 주변을 살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숨소리는 유난히 거칠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대표님,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처럼 기어들어 갔지만, 그 안에 담긴 절박함은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묵직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사원이 대표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나는 그 용기를 가상하게 여겼다.
그래, 정 사원. 무슨 일인데 그래? 편하게 내 방으로 들어와서 얘기하자. 마침 나도 시간이 좀 남네.
아닙니다. 방은 안 됩니다. 저, 혹시 옥상으로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거기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정 사원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흔쾌히 그의 청을 수락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만 들어갈 수 있는 한적한 옥상 정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정 사원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의 정적 속에서 그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고, 엘리베이터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그가 첫 슬롯생활의 고충이나 업무 적응에 대한 고민, 혹은 사내 인간관계에 대한 어려움을 털어놓으려는 줄로만 알았다. 흔히 있는 신입사원의 넋두리라 생각하며, 선배 경영자로서 따뜻하고 멋진 조언을 해줄 준비를 머릿속으로 하고 있었다.
철문이 열리고 옥상의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정 사원은 문이 닫히자마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비상구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뒤, 나를 구석진 난간 쪽으로 이끌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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