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이겨낼 자격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그런 건 모두 어디로 가나.
- 노찬성과 에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쫓기는 사람처럼 그녀의 소설을 찾아 읽는다. 나는 그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상황에 적확한 문장에 감탄했고, 누구나 다루기에 지루한 주제임에도 능숙하게 무게를 옮기는 노련함에 입이 벌어졌다.
산문집은 그녀가 등단하고 17년여라는 시간 동안 느낀 삶 속의 다양한 이름들을 찾아 쓴 글이었기 때문에 이어 읽으며 만난 이 소설은 어떤 감정선을 가지고 다루었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바깥은 여름'이란 바카라제목은 7편이 묶여 있는 단편소설집의 주제를 관통한다. '바깥은 여름'이란 표현에는 화자의 계절은 배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묶여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상실이라는 통증으로 멈춘 불행의 계절, 겨울이다.
소설 제목에서 암시하듯 소설집 전반에 흐르는 감정은 '상실, 고통, 거절, 죽음'들이다. 불행의 모든 요소들은 나의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들이닥친 불가역적(不可逆的) 사건들이다. 그 불행들은 나를 철저히 외면하고 비웃고 끝내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추락하게 만든다.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 중에 나는 '입동(立冬)'과 '노찬성과 에반'을 인상 깊게 읽었다. 늘 그렇지만 소설에서의 개별적 안목은 체험과 독서에서 얻은 밑받침이다. 공감도 그 안에서 기인(起因)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흔히 생각하는 '부재'와 혼돈하는 죽음이 아니었다. 나에게 죽음은 쥐약을 먹고 물 담긴 양동이에 떠있는 마른 쥐였고, 죽은 새끼를 낳고 어미가 밀쳐내 움직이지 않는 강아지였다. 죽음은 싸늘하고 딱딱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 같다. 전쟁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부모님을 말리면서 나는 나의 부모의 인생을 참으로 딱하게 바라봤다. 불의의 사고로 죽지 않고 끝까지 살 수 있을 만큼 살다가 죽으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행복은 기대치가 처음부터 낮았다.
소설집 첫 문을 여는 '입동(立冬)'은 사 계절을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하고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에 숨진 아이가 있었던 어느 가정의 불행이야기다. 어느 보도에서 한 번쯤 보았을 법한 불행이다. 끔찍하고 놀랍지만 우리 아이가 아니라 다행이라 치부하는 불행이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 걸까. 적당한 보상금으로 부채의식을 덜어내려는 타산적인 슬롯의 풍토가 역겹게 읽힌다. 그렇게 보상금은 죽은 아이의 몸값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또 다른 불행으로 다가온다. 이 가여운 부부는 새 벽지를 바르며 아이의 죽음을 가슴에 묻는다.
우리 닦이로 벽면을 꼼꼼히 문지르며 울룩불룩 벽지가 뜬 자리를 반듯이 폈다. 그리곤 속으로 '오늘은 아내가 일어나는 날이구나, 이제 막 일어서려는 참이구나...'생각했다. 그러니 오늘은 내게도 영우에게도 중요한 날이라고, 벽지 든 두 팔에 새삼 힘이 실렸다.
이 부부는 불행을 잊지 않고 살 것이다. 그렇게 불행의 힘으로, 힘을 내고 서로를 아끼고 살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으며 눈물을 닦았다. 나의 부모처럼 서로 탓을 하며 죽일 듯이 싸우지 않아 좋았다.
'노찬성과 에반'에서 '찬성'이는 어린 시절 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찬성이가 유기견을 집에 들여오는 대목을 읽을 때부터 예견된 죽음의 냄새로 마음을 무겁게 했다.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사는 찬성이는 삶 자체가 노화되어 있었다. 탄력을 잃고 육체가 점점 액체화돼 가는 할머니와 죽음을 앞둔 노견과 함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찬성이는 울지 않도록 강요당하며 자랐다. 나를 닮았다.
아이는 '에반'의 안락사를 위해 전단지 오천장을 돌려 돈을 마련하지만 그 돈은 결국 개를 위해 쓰지 못한다. 병에 걸린 노견은 쓰레기더미에서 던져지고 또다시 홀로 남겨진 불행한 아이의 어깨에는 죄바카라감까지 얹힌다.
'잊기 좋은 이름'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처럼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것'이라 되새겨지는 소설집이었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인간은 불행이라는 밑거름으로 성장한다. 삶 속에서 불행은 겨울이다. 우리는 겨울 한 복판에 있을 때는 봄이 올 거라 믿지 않는다. 삶의 착각이다.
바카라을 다 읽고 나는 또다시 죽음에 대해, 불행에 대해 생각한다. 김애란 작가는 상실을 직면한 이들에게 희망의 어떤 불씨도 건네지 않고 끝을 낸다. 그 불행의 딛고 일어설 힘은 당신들에게 있다는 듯이. 참으로 냉정한 작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나 또한 동의했다.
그러다 마지막 단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이 문단을 만났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렸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저자는 산 사람으로서의 삶에 대한 예의를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행을 마주할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글이었다. 어서 삶에 뛰어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구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