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는 나중에 할 수도 있고 안 해도 된다

서툰 화해는 무거운 마음이 덜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허용하는 것


나는 친정 형제들을 떠올리면 가슴 한 편에 찬바람이 들어온다. 애써 지웠다고 생각하다가도 가족들의 기념일이 돌아오면 마음의 지옥문이 열리고야 만다. 아마 형제들 모두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신념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들 자신의 판단을 믿고 흩어져 버렸다.



일찍이 우리와 함께 사시다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가장 잘하신 일을 나는 유산 하나 남기지 않고 가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형제들이 싸울 일이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어머님을 보내드렸고 형제들의 조문객들이 낸 부의금으로 충분히 장례식비용을 치를 수 있었다.



평생 삶의 동아줄은 돈이라고 생각하며 사셨던 친정엄마는 너무나 허망하다 싶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속 썩이는 세입자로 벌벌 떠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당시 엄마의 몸 상태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리척추가 수습하기 힘들 정도여서 강한 마약진통제처방을 받고 있었고 눈과 귀 그리고 씹을 어금니까지 모두 엉망이었다. 30분 거리에 사는 나는 삼일에 한 번씩 드실 반찬과 국거리를 만들어갔고 두 분을 모시고 병원을 오가느라 바빴다. 그 상황에도 엄마에게 돈문제는 항상 우선순위였다.



남은 자식들은 얼굴 하나 비치지 않았다. 두 언니들은 엄마와 6개월간 냉전 상태였고 금쪽처럼 여기는 남동생은 너무 멀리 살았다. 아내를 지킬 아버지는 뇌경색이라는 망치를 맞고 오히려 돌봄을 받던 처지였다. 나는 형제들이 너무 미워 미칠 지경이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어느 날 나는 친정엄마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엄마, 나 엄마아버지 돌아가시면 형제들 보지 않고 살 거예요. 미리 말씀드리니 서운해 마세요."



셋째 딸의 분노를 아셨던 걸까, 친정엄마는 아무 말도 없으셨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늘 아버지가 좋아하는 국을 끓여 오라시던 분이 그날따라 시래깃국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된장시래깃국을 한 솥 끓여가며 나는 콧노래를 불렀던가. 한 그릇 드시고 엄마는 웃으셨고 베란다 창문 밖으로 자동차에 올라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날 밤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다섯 시간 후였다.



그렇게 전화해도 오지 않던 형제들이 친정엄마가 돌아가시자 놀란 얼굴로 모였다. 장례식장에서 그들은 세상 슬픈 얼굴을 하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장례식 이후 그들은 엄마의 유산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펼쳤다. 가장 치사하고 가장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가족이란 서로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불가사의한 관계 같다. 가장 편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이라는 기본값이 자신의 권력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부모의 양육태도가 일방적이거나 편애로 얼룩져 시작되었다면 형제간의 성격형성은 편향적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가족이라는 작은 슬롯를 벗어나 친구를 만나고 교육을 받고 자기 평가를 거치면서 인생의 목표가 각자 재설정된다는 점이다.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보면 형제들에 비해 상당히 불리한 환경에서 자랐다. 사람은 가까운 집단의 구성원을 통해 비교를 하게 마련이어서 형제들보다 부모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정확히 파악한다. 나는 나이 차이 나는 언니들과 귀한 남동생의 사이에 샌드위치로 성장하며 어려서부터 삶이 참으로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 같다. 그것이 엄마의 처지 즉 맏며느리로써 압박의 결과물이 셋째 딸이라는 실망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고 또는 귀한 남동생의 탄생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나의 열등감은 사랑받지 못한 처지에서 시작되었고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한 애정욕구 기반으로 행동이 변했다.



화해는 나중에 할 수도 있고 안 해도 됩니다.



법정스님이 말씀하셨다. 악연은 소중히 여길 대상이 아니라 과감히 덜어내야 할 쓰레기라고.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들로 인해 내가 상처받고 삶이 힘들다면 화해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는 의미다. 상처 준 사람과 화해하는 것은 그 사람이 당신의 삶에 다시 들어올 수 있는 통행증을 내주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실 때 위로처럼 들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먼저 손 내밀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통념이 무거운 용서의 짐처럼 그동안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화해하고 잘 지내면 무거운 마음이 덜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스님은 말씀하셨다. 지금 충분히 아프다면 화해는 무의미하며 화해를 할지라도 상처가 아물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때로는 영원히 보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자비라고 하셨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정말로 오래 걸린 것 같다. 그 말은 나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라는 의미였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밥이 모래알처럼 씹히지 않았다. 너무나 당신의 몸을 소홀히 하고 돈의 노예가 되어 사신 엄마의 평생이 불쌍해 속상해 미칠 것 같았다. 그토록 엄마의 사랑을 갈구한 셋째 딸은 보지 않고 끝내 아들에게마저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엄마를 대신해 억울함을 느꼈다. 두 달을 그렇게 속을 썩자 어금니가 빠지더니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내 몸을 내가 망가트리고 있었다.



형제들에게 원망이 돌아갔다.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지었음에도 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힘이 드는가 생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칭얼대는 봄날씨처럼 변덕스러운 아이가 된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을 되새긴다. 용서를 하지 않기로 했다면 더 이상 상대를 생각하지 말라고. 나의 행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무관심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마음의 비싼 방을 그들에게 내주지 말라고.



남편과 서울대공원으로 봄산바카라을 나섰다. 먼발치에 호숫가 둘레길 끄트머리로 도란도란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그림처럼 보였다. 나의 마음은 왜 편안하지 않나. 똑같은 봄햇살을 맞고 있는데 말이다. 복잡한 마음을 버리기로 다짐한다.



나만 사용하는 탁상달력에 조그맣게 기록한 친정식구들의 기념일을 남편이 보았는지 외식을 하자며 나의 손을 잡는다. 나는 그들에게 내 마음의 비싼 방을 내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남편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