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이 없다는 고통
이런 구조에서 일하는 개발자는 단순히 발주를 낸 갑 회사의 요구사항을 프로그램에 100% 담아낼 뿐, 그 어떤 혁신이나 성과 같은 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 이 판에서 아무리 일을 잘해도 업무를 더 떠안을 뿐, 그 누구도 수고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작업한 소스코드의 양이 많다는 건 오히려 오류 발생률과 완성도 저하의 위험만 스스로 키우고 독박 쓰기 딱 좋은 지름길이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싸매고 피땀 흘려가며 개발한 그 프로그램과 소스코드가 접근이 제한된 기업의 내부 보안서버에 설치가 완료되면, 개발자 본인은 더 이상 그 소스코드를 보유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프로그래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상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영업에 성공하는 개발자는 극소수였다. 그나마도 후발주자로 뛰어드는 세대한테는 그 어떤 아이디어를 고심해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 한들 기존에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제품들을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프로그래머는 코딩과 컴퓨터에만 전문가이지 영업이나 마케팅, 기획에 익숙한 게 아니니 스스로 회사를 만들어 사장을 자처한다고 한들 가능한 역할에 제한이 많이 생겼다.
결국 개발자의 커리어는 운 좋게 돈이 되는 서비스 및 솔루션 소프트웨어를 보유한 회사에서 이해관계자에게 치이거나, 철저히 갑 위주의 대형 개발 프로젝트의 구석진 사무실에서 부품으로 소모되는 방식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