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콩자반이라니요?

PTSD의 시작.

by민영

중학교 시절.

엄마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나와 오빠만 집에 남아 생활하게 된 적이 있었다.


생계를 바카라임지시느라 늘 바쁘셨던 엄마셨기 때문에, 학교를 마친 후 냉장고 속 반찬을 꺼내 끼니를 때우는 것은 우리 남매의 일상이었으니 며칠간 엄마가 집에 돌아오시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평상시와 다름없는 여름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엄마가 계시는 병원에 들러 안부를 확인하는 루틴이 새로 생겼다는 것 정도.





얼마 후 애들만 집에 있다는 소식이 엄마의 지인들과 혈육들에게 전해지자, '이모들'의 챙김이 조금씩 늘어갔다.

양념 고기며 겉절이, 과일 같은 먹거리들이 하나, 둘 집에 도착했고, 오빠와 내가 잘 챙겨 먹고 있다는 소식을 엄마에게 전하면 '이모들'과 엄마의 연락 채널이 완전해졌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일상에 익숙해지던 어느날.

유리병 가득 채워진 검정콩을 받았다.


밥에 넣으라고 주신건가? 생각한 찰나,


"간장에 진득하게 졸였는데, 처음 만들어 본 거라 이것저것 자꾸 넣었더니 조금 딱딱해진 것 같더라. 그래도 건강에 좋은 거니까 챙겨 먹어."
"네.."



사실 오빠와 나는 콩을 싫어한다.


매년 방학이면 목포에 계시는 할머니댁에 모든 손자, 손녀들이 모여서 2주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었는데, 그곳에 모인 친척들 중, 유독 큰집 식구들은 우리 가족을 탐탁치 않게 여겼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느낄 정도로 눈치를 주셨는데, 우리가 느꼈던 가장 큰 차별은 음식이었다.

식구들 중에 가장 잘 살던 그 집에서 눈치밥을 먹는게 불편했던 나는 목포 큰집이 그리도 싫었다.


요리를 지독히도 못하시던 큰엄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시지와 햄, 계란프라이 같은 손쉬운 반찬을 낼법도 한데, 어째 요리라고 부리기도 애매한 것들만 밥상 위에 가득했었다.


데친 쪽파나 채소.
젓갈
길이로 자른 당근.
콩자반.


언감생심 고기 반찬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밥을 먹기도, 남기기도 뭐한 그 식탁에 앉아 유리 아래 깔려있던 하얀색 레이스 장식만 한참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돈까스나 분홍 소세지같은 맛있는 반찬을 먹으려면 큰집의 두 아들들이 함께한 식사 자리였어야 했는데, 덕분에 내게는 '대전제'가 하나 생겼다.


큰엄마는 우리를 싫어해서 콩자반만 주신다
누군가가 콩자반을 내온다.
그는 우리를 싫어한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3단 논리지만, 가난했던 우리 식구들을 함부로 대했던 큰집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름 논리적인 논제라고 생각했다.

나와 오빠는 그런 눈칫밥이 싫어서 할머니집에서 먹던 매일 똑같은 반찬이 마음 편했으리라..



그런데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우리를 염려해 주시는 분이 만들어주신 반찬이지 않은가?

먹어야지.




다시 저녁.

오빠와 단둘이 남은 나는 이런저런 반찬들을 꺼내 상을 차렸다.

콩자반을 그릇에 덜다 한 알을 먼저 맛보았는데, 어금니로 아무리 문대 보아도 콩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식물이 이렇게 단단할 수가 있나?




오빠, 이거 안 씹혀.



콩자반은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오빠가 대답했다.



도로 담아놔.



사춘기시절 대면대면하던 오빠와 처음으로 마음이 맞았던 밤이었다.

그릇에 놓았던 콩알들을 다시 유리병에 담으며, 오빠의 그 짧은 한 마디가 얼마나 듬직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날의 콩자반을 어찌 처리했었던가?

BB탄 총에 넣어서 멀리 쏴 버렸었나?

아마도 퇴원하신 엄마가 '씹히지도 않네.'라는 한소리를 하시고 버리셨던 것 같다.






몇 년 전 새언니와 수다를 떨다 콩자반 이야기가 나왔다.


어머, 아가씨!
오빠도 그 이야기 종종 해요.
지금도 콩자반 보면 엄청 싫어하거든요!
사람 무시하냐고! ㅋ



성인이 되고 해외에서 생활한 세월이 길이진만큼, 오빠와 나는 대화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바쁘게 살아가던 우리 둘에게,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콩자반의 기억만은 강하게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 이게 PTSD 지..

30년이 지나서도 꺼려지는 것. 괴로운 것.


적어도 우리 남매에게 콩자반은, 생활형 PTSD 유발 인자인 것이 분명하다.


결혼 생활 15년차.

내 남편은 단 한번도 우리집 밥상에서 콩자반을 본 역사가 없다.

그리고 천수를 다하는 날까지도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가난하던 날의 설움 20%와 지독히 맛 없는 양념 30%를 더해, 콩이 남기는 텁텁한 식감 50%로 이루어진 그 음식은, 우리집 반찬 Black List에서 영원한 1위일 것이다.


#안먹어요 #콩자반 #왕시러




이전 02화그 곱창이 그 곱창이 아닌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