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는 쪽
세번째
이성두 시인의 시집
[별꽃은 피고 지고]
3부 돌아보는 쪽
시인: 전진식
3부에서는
시인의 내면의 세계, 시인 자신의 이야기, 숨겨두었던 속마음의 이야기를 꺼집어 내어봅니다
마음을 고백하는 글이라고 이야기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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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성두
문은
닫히지 않았다
다만 나를 위해
열린 적이 없었다
누구는 들어오고
누구는 나가고
나는 끝내
앉아만 있다
문은 열려 있는데
가슴 속 무엇 하나
풀어놓지 못하고
속옷마저
찢고 싶었다
<시인의 시선>
[문p85]
이 시는 짧지만,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젖어 옵니다
문은 열려 있는데 시인은 그 문을 통해 자유롭게 출입을 하지 못합니다. 자유롭지 못한 일상은 시인을 동굴 속으로 가두어 둡니다. 닫힌문이나 열린문이나 차라리 벽을 만들어 문을 없이하는 것도 생각해 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시인의 주변을 알아야 합니다.
절룩거리는 문둥이 시인도 자기를 부정하지 않았는데 여기 이 시인도 자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이 열려 있어도 시인은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앉은뱅이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삶에 참여하고 싶어도 하지못하는 움직일 수 없는 무력감으로 읽힙니다.
자 그럼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다만 나를 위해
열린 적이 없었다]
저는 이 첫 부분에서 詩 전체를 읽었습니다 찡한 가슴에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문은 닫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열린 문 사이로 오가는 사람만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일 수도 있고, 소통의 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슬롯적 기회나 삶의 가능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려있어도 시인은 집안에 갇혀 있습니다. 세상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시인은 어항 속에 갖혀 있습니다. 시인에게는 도전이라는 끓는 가슴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회를 탐 할수 없는 답답한 가슴. 열린문 앞에서 머물러 있는 시인은 차라리 문이 '열린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문이 열려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과 자신을 위해 열린 적이 없다는 주관적인 사실을 두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둥 합니다.
다음 연에서는 움직이는 사람들과 멈춰 있는 시인을 봅니다
[누구는 들어오고
누구는 나가고
나는 끝내
앉아만 있다]
이 대목에서는 시의 정서가 더욱 구체화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들어 왔다가 나갑니다. 그러나 시인은 꼼짝없이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앉아 만 있다'는 것 외에 마음의 절박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끝내'라는 표현도 눈여겨 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두 행이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여 준다면, '끝내'는 그 움직임을 바라보던 시인은 체념을 드러냅니다.
가장 강렬한 대목, 마지막 연을 보겠습니다.
[문은 열려 있는데
가슴 속 무엇 하나
풀어놓지 못하고
속옷마저
찢고 싶었다]
여기서 시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앞부분에서는 외부 세계와 시인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갈수록 시선이 시인의 내면으로 향합니다.
문은 열려 있고 외부의 출입을 막는 장애물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가슴속에는 풀어놓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억눌린 감정일 수도 있고, 아내로 하여 상대에게 자신의 처신을 다하지 못한 상처나 수치심이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점이 시인의 詩에서 보이는 장점입니다.
시를 보면서 독자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그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속옷마저 찢고 싶었다'는 표현은 상당히 강렬합니다. 속옷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장 사적인 영역을 상징합니다. 그것마저 찢고 싶다는 것은 단순한 답답함을 넘어, 자신을 감싸고 있는 마지막 껍질까지 벗어 버리고 싶은 절박함으로 읽힙니다.
이 시의 감정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데서 해소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찢어서라도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싶은 지경에 이릅니다.
저는 이 표현은 시인의 응어리진 가슴이 폭발하는 장면으로 읽힙니다
*이 시는 쟁점은 단순한 고독의 노래가 되지 않고 시인의 응어리진 가슴을 터트리는 활화산을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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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나는
날마다
거울 보며 최면에 빠진다
늙었다
늙었다
보이는 나는
거울의 것
바라보는 나는
내 안에 남았다
거울은
제 눈 늙은 줄
모르고
내게 최면을 거네
<시인의 시선>
[최면p90]
이 시는 앞서 보여 준 [문]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봅니다. [문]이 소외와 내면의 고통을 다루었다면, [최면]은 늙어 가는 육체와 늙지 않았다고 느끼는 내면의 자아를 다루고 있습니다.
짧은 詩이지만, 노년의 자신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습니다.
첫 부분부터 주제가 분명합니다.
[나는
날마다
거울 보며 최면에 빠진다
늙었다
늙었다]
첫 세 행에서 시인은 날마다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젊다'가 아니라 '늙었다'입니다.
여기서 나는 잠시 멈추어 시인의 얼굴을 다시 그려봅니다. 늙었다? 아니 그는 나이보다도 10년은 젊어 보입니다, 자신의 바램인지도 모르지요. 착각이 현실 속에 최면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보통 최면이라고 하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나 믿고 싶은 생각에 빠지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시인은 거울 앞에서 늙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있으면서도 부정하고픈 사실로하여 자신의 젊음을 되뇌여 봅니다
이것은 늙음을 인정하는 행위일까요? 아니면 늙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의식하다 보니 오히려 그 생각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다만 '늙었다'를 두 번 반복한 것이 조금 단순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만 이 반복에는 나이 듦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그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시인의 심리가 담겨 있습니다.
[보이는 나는
거울의 것
바라보는 나는
내 안에 남았다]
저는 이 부분을 이 시의 핵심으로 봅니다.
특히 '보이는 나'와
'바라보는 나'의 구분이 좋습니다.
거울에 비친 나는 늙은 모습입니다. 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변하고, 젊은 시절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어떨까요?
자신의 내면에서는 여전히 젊은 날의 기억과 욕망과 감정이 살아 있습니다. 몸은 늙어 가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는 똑같이 늙었다고 느끼지는 않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나는 거울의 것'이라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분명 나 이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뜻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니까 거울 속으로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지요
이어지는
'바라보는 나는
내 안에 남았다'는 구절은 현실과 내면의 자아를 구별합니다.
거울은 육체를 보여 주지만, 내면의 나까지 보여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발상은 노년을 다루는 시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발견입니다.
마지막 연을 살펴보면
[거울은
제 눈 늙은 줄 모르고
내게 최면을 거네]
이 부분
작품을 마무리하는 방식은 재미있습니다.
앞에서는 시인 자신이 거울을 보며 최면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최면을 거는 주체가 거울로 바뀝니다. 거울은 자신이 늙은 줄 모릅니다.
사실 거울은 늙을 수가 없지요. 늙는 것은 거울 앞에 선 시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거울에게도 눈이 있고, 그 눈에도 세월이 흐르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역설과 의인화가 함께 작동합니다.
더욱이 '내게 최면을 거네'라는 마지막 행은 첫 연의 '최면에 빠진다'와 호흡을 같이 합니다. 시의 시작과 끝이 연결되면서 구조적인 완결성이 생깁니다.
다만 의미를 조금 더 따져 보면, 거울은 시인의 늙음을 비춰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눈 늙은 줄 모르고'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 낯선 표현이 이 시의 개성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마음속의 자신은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젊은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고, 하고 싶은 일도 남아 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거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울은 보는이의 내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의 얼굴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거울이 오히려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울을 볼 때마다 늙음을 확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를 단순히 늙음에 관한 시라기보다 늙어 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의 이중성에 관한 시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절단의 이면
나는 가끔
세상을 종이처럼 접는다
금이 간 선을 따라
가위는 망설임 없이 내려가고
잘린 쪽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떨어진다
바닥에는
사각의 침묵이 쌓인다
창밖의 나무는
가지 하나 잃은 채
바람을 견디고
거울 속 인물은
어깨가 반쯤 비어 있다
잘린 면마다 내가
조금씩 보인다
잘려 나간 쪽이
안쪽이었는지
나는 아직
가장자리에서
중심만 믿고 앉아 있다
*** 이 작품에서 나는 가슴에 확 당기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상실을 단순히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려 나갑니다. 나무도 가지를 잃고, 거울 속 인물도 어깨가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질문합니다.
잘려 나간 것이 정말 바깥이었을까?
어쩌면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잘려 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이 질문은 인간관계에도, 삶의 선택에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을 노래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는 설명을 더한다고 좋아질 작품이라기보다, 좋은 이미지가 우리들의 마음에 오래 머물도록 다듬을 때 더 좋아질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의 눈>
[절단의 이면 p92]
이 시는 앞서 보여 준 '문'이나 '최면' 보다 이미지가 복합적이고, 의미의 층위도 깊이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종이를 자르는 행위에서 출발하지만, 시가 진행될수록 절단은 관계의 단절, 상실, 자아의 분열,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 폭이 넖어집니다.
특히 제목의 ‘이면’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잘라 낸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없애는 행위이지만, 이 시는 잘려 나간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첫 연의 발상이 멋집니다
[나는 가끔
세상을 종이처럼 접는다]
세상을 종이처럼 접는다는 표현은 현실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다음 연에서
['금이 간 선을 따라
가위는 망설임 없이 내려가고']
여기서 그 종이에 금이 가고 가위가 내려갑니다.
‘금이 간 선’은 이미 생겨 버린 균열입니다. 깨어진 인간관계의 갈등일 수도 있고, 시인의 삶에서 돌이킬 수 없게 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시인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봅니다.
가위가 망설이지 않는다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사람은 망설일 수 있지만, 일단 절단이 시작되면 가위는 정해진 선을 따라 움직입니다.
무정입니다.
이 때문에 절단은 의지에 따른 선택인 동시에, 이미 벌어진 상황이 낳은 필연처럼 느껴집니다.
['잘린 쪽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떨어진다
바닥에는
사각의 침묵이 쌓인다']
저는 이 부분이 시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잘려 나갔는데도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갑니다.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는 큰 사건이지만, 바깥에서는 별일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경험은 인간관계에도 나타납니다. 누군가와 관계가 끊어졌을 때, 한쪽은 큰 상처를 입지만 다른 쪽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각의 침묵’은 그 상실 뒤에 남은 흔적입니다.
'종이의 사각형'
'사라진 뒤의 침묵'을 결합한 점이 좋습니다.
[창밖의 나무는
가지 하나 잃은 채
바람을 견디고]
이 부분에서는 종이를 자르는 행위가 자연으로 옮겨 갑니다.
나무는 가지 하나를 잃었지만 여전히 바람을 견딥니다. 상처를 입고도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다음 연은 한층 더 흥미롭습니다.
[거울 속 인물은
어깨가 반쯤 비어 있다]
이 구절은 시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연에서는 나무의 가지가 잘려 나갔다면, 거울 속 인물은 어깨가 비어 있다?.
자연에서 일어난 절단이 인간의 몸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특히 '아프다'거나 '상처를 입었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고, 어깨가 비어 있다고 표현한 점이 돋보입니다.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바라보면서 잃어버린 것들의 크기를 상상하게 되는데 여기서 보이는 거울은 단순한 반사체가 아닙니다. 외부에서 일어난 절단이 결국 자신의 내면과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읽힙니다.
[잘린 면마다 내가
조금씩 보인다]
이 시의 중심이 후반부로 넘어 오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시의 의미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잘려 나간 것들이 상실의 흔적이었다면, 이제는 그 잘린 면에서 시인은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상처와 단절을 겪고 나서야 자신이 보이는 것입니다.
절단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감춰져 있던 자아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잘려 나간 쪽이
안쪽이었는지]
이 시에서 제가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인가를 잘라 낼 때 바깥쪽을 제거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라 낸 것이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안쪽?
타인과의 관계를 끊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일부를 잘라 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버렸다고 믿었지만, 정작 잃어버린 것은 자신에게 소중한 부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잘라 냈는가보다, 잘라 낸 뒤에 무엇이 남았는가를 묻는 시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 덕분에 작품은 단순한 상실의 시를 넘어 자기 성찰의 시로 나아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 행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나는 아직
가장자리에서
중심만 믿고 앉아 있다]
마지막 연은 의미가 열려 있는 만큼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가장자리’는 중심에서 밀려난 자리, 불안정한 위치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자리에서 ‘중심만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가장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중심을 믿는다는 점에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이 모순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신이 믿고 싶은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자신은 이미 균열과 상실을 겪었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중심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또는 자신이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가장 좋게 느껴지는 점은 상실을 단순히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려 나갑니다. 나무도 가지를 잃고, 거울 속 인물도 어깨가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질문합니다.
잘려 나간 것이 정말 바깥이었을까?
어쩌면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잘려 나간 것은 아니었을까요?
시인은 아픔을 노래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아픔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