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회 6 청량리발 경춘선

by홍길동

https://www.youtube.com/watch?v=0hUg9v1GnxM



[청량리발 경춘선, 3호차 17번 좌석 주변]


영훈이 완력을 발휘해 등받이를 뒤로 홱 넘기자,

'철컥' 소리와 함께 네 명이 마주 보는 전형적인 엠티 좌석이 만들어 진다.

통로 너머에서는 과 잠바를 맞춰 입은 다른 대학생들이 벌써 기타를 튕기며

'아침이슬'이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곧이어 "삶은 계란~ 오징어~ 시원한 맥주 있어요~"라는

홍익회 아저씨의 외침과 함께 간식 수레가 지나간다.


좁은 좌석 사이에서 네 명의 무릎이 자꾸 맞닿는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가교(가정교육)과 해연이 먼저 손뼉을 치며

"야, 우리 입석 학생들 눈치 보이는데 조용히 게임이나 할까?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소개 하기! 어때?"

"것보다 007빵이 어떠니" 미경이가 거든다.

해연이는 미경의 여고 동창이라 우주회 회원 만장일치로 입회한

좀 특이한 케이스다. 좀 더 특이한건 현모양처가 꿈이라 한다.


"0, 0, 7, 빵!"

마지막 '빵' 소리와 함께 내가 손가락으로 미경이를 정면으로 쏜다.

순간 미경이는 무표정하게 나를 응시하며 가만히 있는다. 정적.

이 게임의 규칙대로라면 미경이 양옆에 앉은 영훈이랑 해연이가

"으악!" 소리를 지르며 만세를 불러야 한다.

그런데 영훈이는 창밖 북한강 줄기를 보느라 타이밍을 놓쳤고,

해연이는 내 손가락 끝에 묻은 은색 락카 자국을 멍하니 보다가 팔을 올릴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아, 뭐야! 둘 다 틀렸잖아!"

내가 소리를 지르자, 해연이가 뒤늦게 "으악!" 하며 손을 들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다.

좁은 좌석 사이로 우리 넷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규칙대로라면 양옆의 두 사람이 벌칙주를 마셔야 하는데,

미경이가 갑자기 나를 빤히 보며 입을 연다.

"준호야, 근데 너 왜 아까부터 나만 쏴?"

미경이의 돌직구에 웃음소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해연이는 들고 있던 손을 어색하게 내리며 내 눈치를 봤고,

영훈이는 괜히 안경을 고쳐 쓰며 헛기침을 한다.

"그거야 네가 내 정면에 있으니까..."
"거짓말. 너 아까 0, 0, 7, 그릴 때 이미 나 찍어놓고 그리더라."

미경이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생긋 웃더니, 내가 마시려던 캔맥주를 뺏어 한 모금 들이킨다.


그 해 여름의 기차 안, 007빵 게임 하나에 네 사람의 마음이 엇박자로 튀어 오른다.

누구는 쏴야 하고, 누구는 손을 들어야 하고, 누구는 침묵해야 하는 그 기묘한 관계처럼.



강촌역 앞 뙤약볕은 가차 없다. 지열이 운동화 밑창을 뚫고 올라온다.

저만치 앞서가는 미경이의 낡은 화구 가방이 걸음마다 위태롭게 흔들린다.

저거, 내가 들어줘야 하는데. 발을 떼려는 찰나, 오른쪽 팔에 묵직하고 뜨거운 감각이 확 감겨든다.

“아, 진짜 덥다! 준호야, 나 좀 붙잡고 가자. 쓰러질 것 같아.”

해연이다. 평소엔 시원시원하던 녀석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깝다.

당황해서 팔을 빼려 하지만, 해연이는 아예 내 팔뚝에 제 몸을 기대며 힘을 꽉 준다.

8월 햇볕보다 해연이의 체온이 더 뜨겁게 살죽에 달라붙는다.

“야, 너 미쳤어? 이 더위에 무슨 팔짱이야.”

“어지러워서 그래. 아까 기차에서 벌칙주 마신 게 이제 올라오나 봐. 싫어?”

해연이는 고집스럽게 나를 올려다본다.

그 눈빛이 평소와 다르게 짙고 촉촉해서, 차마 매몰차게 뿌리치지 못한다.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어느새 영훈이가 미경이 옆에 바짝 붙어 있다.

“미경아, 가방 이리 줘. 내가 들게.”

영훈이가 경영학과 과대표다운 매끄러운 동작으로 미경이의 가방 끈을 낚아챈다.

미경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해연이 팔에 묶여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정적.. 미경이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영훈이와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영훈이의 반듯한 셔츠 뒷모습과 미경이의 헐렁한 티셔츠가 묘하게 겹쳐 보인다.

가슴 한구석이 홧홧해진다.

“준호야, 안 가? 다들 저만치 가잖아.”

해연이가 내 팔을 잡아끈다. 나는 해연이에게 끌려가듯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만 멀어지는 미경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내 팔뚝 위에 닿은 해연이의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그저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만 노려본다.


그 해 여름, 강촌. 우리 넷은 그렇게 두 명씩 짝을 지어,

서로 다른 마음의 속도로 민박집을 향해 걷는다.

민박집 마당에 도착하자마자 해연이 팔을 풀며 묻는다.

“준호야, 너 왜 이렇게 팔이 뜨거워? 땀이야, 아니면 화난 거야?”

“ 아 아니.. 아무것도..“

“ 근데 준호야 넌 아우라니 뭐니 그런 말 잘 안쓰네.“

“글쎄 안쓴다기 보다는 잘 몰라서..모르면서 읊어대는게 맞나해서...“

계속 내 눈을 쳐다보는 해연..

“걍 고딩때 처럼 ...그게 나한테맞는거 같아.“

“그래서 아직도 고딩인거니“

이 느닷없는 의미 심장한 한마디..

뭔가 띵하다..

이런 우리 둘을 미경이가 안보는 척 안듣는 척..

계속 이쪽으로 안테나를 돌리고 있는 느낌이다.



20000



넌 언제나 내게 잃어버리긴 싫다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유혹하듯 얘기하면서도

이리저리 재는 건지 자손심인지

힘들 때 생각나는

친구 이상은 아니라 하네


예쁘장한 얼굴

귀엽게 웃는 그 모습에

널 떠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그대 안쓰러워

가끔씩은 다그치고

가끔은 달래 보아도

이제는 내가 지쳐

그댈 떠날 수밖에 없어요


그댈 위해 버린 시간들을

이젠 다시 찾고 싶어요

더 이상 그대의 인형은 싫어

그대만의 내가 안 된다면

나만의 그대도 될 순 없어

더 이상 그대의 연극은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