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의 아파트 단지는 매미 떼의 울음소리로 장난이 아니다.
손에 든 검은 봉지 속 얼음주머니가 걸을 때마다 허벅지에 차갑게 부딪힌다.
복도식 아파트의 긴 통로를 지나 미경의 집 현관 앞에 선다.
실기실에서 밤을 새우며 야작 하던 미경이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다.
하지만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내 발걸음이 굳는다.
문을 열고 들어선 거실, 그곳에 경제학과 영훈이 앉아 있다.
우량아 대회에서 일등 했다고 늘 자랑하던 녀석. 세 번 정도 본 거 같다.
녀석은 자기 집인 양 난닝구 비슷한 티를 걸치고 헐렁한 반바지 차림으로 사과를 깎고 있다.
녀석의 듬성듬성한 타리털이 괜히 신경을 거슬린다. 아니 많이 거슬린다.
침대에 누워 있는 미경의 이마에는 정갈하게 접힌 수건이 놓여 있고,
그 옆엔 영훈이 가져온 듯한 대학병원의 약봉투가 위압적으로 놓여 있다.
"어, 왔어?"
영훈이 고개를 까닥하며 묻는다. 사과 껍질을 끊기지 않게 능숙하게 깎아낸다.
"미경이 많이 아프대서. 이건 뭐야, 병원 다녀온 거야?"
내가 묻자, 영훈은 과도로 사과 한 조각을 툭 찍어 미경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얘네 어머니가 나한테 연락하셨더라고. 워낙 어릴 때부터 봐서 내가 어디 아픈지 제일 잘 알거든.
넌 예술과랬나? 과제 많을 텐데 굳이 여기까지 뭐 하러."
말투는 부드럽지만 눈빛은 다르다.
국민학교 때부터 쌓아온 10년의 세월을 훈장으로 나를 몰아세운다.
미경은 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작게 웃어 보이지만,
영훈이 건네는 사과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먹는다.
나는 가져온 얼음주머니를 거실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예술과는 원래 관찰이 전공이라. 미경이가 아플 때 어떤 표정 짓는지 궁금해서 왔지.
근데 영훈아, 경제학과면 셈이 빠를 텐데. "
" 어 빠르다면 빠른 편이지. 왜? "
" 지금 니가 여기 있는 게 미경이한테 '플러스'냐 '마이너스'냐.. 어느 쪽이냐?"
녀석은 과도를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서서 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180이 넘는 그의 키가 거실에 긴 그림자를 만든다.
"계산기 두드려야 아는 사이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우린 그냥 '당연한' 사이거든. 안 그래, 미경아?"
미경은 대답 대신 가벼운 기침을 내뱉으며 이불을 끌어올린다.
영훈은 즉각 몸을 숙여 미경의 이마를 짚는다. 손등으로 열을 재는 그 자연스러운 스킨십.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미경의 머리맡에 놓인 물컵을 새로 채우려 손을 뻗는다.
좁은 침대 곁에서 내 손과 영훈의 팔꿈치가 거칠게 부딪힌다.
"비켜봐, 물 갈아주게."
"내가 해. 넌 손님답게 저기 가서 TV나 봐."
미묘한 감정이 싹트는 건 이때부터라 생각이 든다.
거실 창밖으론 매미의 울음소린지 웃음소리로 더욱 부산스럽다.
https://www.youtube.com/watch?v=8JzVpnFOKao
방 안의 정적을 깬 건 미경의 짧은 한숨이다.
미경은 녀석의 손을 살짝 밀어내고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앉는다.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둘의 유치한 기싸움 때문인지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반짝거린다.
"둘 다 그만 좀 해. 머리 울려."
미경이 탁자 위에 놓인 카세트테이프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툭 던진다.
"나 감기 다 나으면, 강촌 갈 거야. 거기 가서 이 지긋지긋한 열 좀 식히고 싶어."
영훈과 나는 동시에 입을 떼려 하지만, 미경이 먼저 선수를 친다.
"영훈이 넌 운전해. 너네 집 차 빌려올 수 있지? 그리고 너는..."
미경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간지러운 열감이 번진다.
"너는 카메라 챙겨 와. 예술과 답게 우리 사진 좀 제대로 찍어봐. 우리 제대로 찍은 사진 한 장 없잖아."
그러고 보니 나와 미경이 같이 찍은 사진이 없다.
영훈은 못마땅한 듯 깎다 만 사과를 씹어 삼키며 투덜댄다.
"강촌? 야, 거기 가면 또 술만 마실 텐데 너 몸이 버티겠냐?"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주머니 속 차 키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거절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나 역시 챙겨 올 필름 종류를 생각하며 웃으며 미경에게
"좋아. 경춘선 기차 소리 들으면서 바람 쐬면 감기 같은 건 금방 떨어질 거야."
살짝 미소를 머금는 미경. 그런 미경을 쳐다보며 뚱한 영훈의 표정.
"그럼 결정된 거다? 나 약 먹고 잘 테니까 둘 다 나가. 가서 계획이나 짜오든가."
눅눅한 공기 사이로 서늘하고 청량한 강촌의 하얀 바람이 미리 불어오는 것만 같다.
알았다며 영훈과 나는 어색하게 현관으로 향한다.
복도식 아파트의 긴 통로로 나오자 8월의 뜨거운 열기가 다시 우리를 덮친다.
영훈이 앞서 걸어가며 툭 한마디 던진다.
"야, 예술학과. 운전 연수는 내가 시켜줄 테니까 기름값은 니가 내라."
" 글쎄 후진차보다는 기차가 낫지 않냐."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만다. 여전히 질투가 섞인 묘한 기류..
잠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는 길,
내 머릿속엔 이미 짙은 초록색의 강촌 풍경과
그 속에 활짝 웃고 있을 미경의 모습이 필름처럼 인화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중 누군가는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조금 두려운 생각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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