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서와 포스터 놓고 옥신각신

은퇴 부부의 찰떡쿵

by그님

부르지 말 걸 그랬다.

부탁하지 않아도 될 걸 그랬다.

실수할까 염려되어 봐달라고 부탁한 게 실수였다.


"여보, 시간날 때 작은도서관에 와줘. 월보고 해야 하는데 당신이 한번 봐줬으면 좋겠어."

"알았어요. 이따 헬스장 가기 전에 들를게요."

"고마워."


작은도서관에 가서 먼저 월보고 작성을 했다.

어렵지 않았다.

내편이 왔다.

"당신 왔어? 이거 한번 봐줘 봐. 일단 내가 했거든."


월보고 내용을 꼼꼼하게 보는 내편.

뼛속까지 공무원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꼈다.

하나 하나 꼬집어 가면서 말했다.

문서 날짜와 번호까지 체크하며 알려줬다.

처음 알게 되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도서관 주최 미술대회가 있다.

내가 만든 포스터는 지난 몇 년간 사용한 것을 토대로 다시 만든 것이다.

바카라상에 놓여 있는 미술대회 접수 상황을 보고 포스터를 본 내편.

관리 소장님에게 이메일로 전달했더니 제목을 바꿔서 다시 보내왔다.

발단은 포스터 제목이었다.


미술대회 실시 계획안 공문에 '어린이 한마당 그림대회'라고 써있는데

왜 마음대로 '그림 그리기 대회'라고 썼냐는 것이다.

지난해 남겨 놓은 포스터 사진을 보고 문구를 그대로 썼다고 했더니

내가 실수한 거라고 지적했다.

공문서의 제목은 마음대로 바꾸는 게 아니라고 했다.


확인하니 지난해까지 3년은 포스터에 '그림 그리기 대회'라고 써있었다.

지난 담당자가 잘못 쓴 것을 따라 한 것이 내 잘못이라 했다.

공문서에 나온대로 바로 잡아야 하는 거라고.

나름 실수없이 잘 하려고 했는데

잘못된 제목을 따라 썼기 때문에 내 잘못이라고 했다.


"여보, '어린이 한마당 그림대회'라고 쓰건, '그림 그리기 대회'라고 쓰건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미술대회인데."


"그게 아니에요. 실시 공문의 제목이 있으면 그대로 써야 하는 거예요. 당신이 포스터를 제대로 만들었으면 관리 소장이 이걸 바꿨겠어요? 그리고 담당자인 당신이 만든 걸 소장이 건드리면 안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완벽하게 해서 제출해야죠. 제목이 공문서와 다르니까 소장이 고친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작년과 재작년에는 안 고치고 이번에 고친 거야?"


"전 관리자가 관리사무소에 사진으로 보냈으니까 손댈 수 없어서 그랬을 거에요. 그 담당자는 문서작성을 못해서 누군가 해준 것 같아요. 그래서 못 바꿨을 수도 있어요. 근데 당신은 문서를 만들어 보내 줬으니까 고칠 수 있었던 거죠."


"그럼 소장님이 말을 해줘야지. 말하면 내가 고치잖아."


"그걸 어떻게 말해요. 알아서 고쳐준 것만 해도 고맙죠."


"안 고마워. 자존심 상하거든. 잘못된 부분은 말해 줬어야지."


"어쨌든 소장으로서는 이번에 제목을 바로 잡아서 다행이라 생각할 거예요."


"그런 거야? 그럼 다행이네."


"문서라는 게 왜 존재하는지 당신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모르지. 난 공무원 안 했으니까. 공무원 정말 피곤해. 이것저것 따지고. 그냥 대충하면 되겠구만."


"대충이 어딨어요. 그건 약속인데요. 약속 어기면 모두 헷갈려요. 그래서 문서가 있는 거예요. 그걸 토대로 해야 하니까요."


"하~ 어렵다. 당신 말을 듣고 보니까 맞긴 한데 그렇게 안 해도 세상 돌아가."

내편의 표정이 가관이다.

아니 내 말이 가관이라서 어이없나 보다.


내편이 작은도서관에 봉사할 때 이래서 어려워 했던 것 같다.

알려 주는 것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고 힘들어 했었다.

문서를 옳게 잘 유지해야 다음 사람이 실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실수를 내가 한 셈이다.


내편과의 언쟁은 조금 불편했지만

이제야 확실하게 공문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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