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석은 거래처 사무실에서 발주서를 보고 있었다.
담당자가 수량 하나를 짚었다.
“이건 다음 주로 넘길게요.”
“재고 있으세요?”
“조금.”
“나머지는 그대로고요?”
“네.”
준석이 발주서에 표시했다.
그때 허리춤에서 소리가 났다.
삐삐삐.
준석이 고개를 들었다.
담당자도 쳐다봤다.
“김 대리 거 아니에요?”
“아.”
준석이 호출기를 꺼냈다.
화면에 처음 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언제 그런 것도 샀어요?”
“며칠 안 됐습니다.”
준석은 호출기를 다시 허리춤에 찼다.
“그럼 이건 다음 주에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서류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 * *
길 건너 공중전화가 비어 있었다.
준석이 동전을 넣고 호출기에 찍힌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 네.
“호출하셨습니까? 김준석인데요.”
— 아, 김 대리님. 동성공업에서 번호 받았습니다.
준석은 메모지를 꺼냈다.
“네. 말씀하세요.”
상대가 품목과 규격을 불렀다.
“잠깐만요.”
준석이 숫자 하나를 고쳤다.
“뒤에 다시 한번 불러주시겠습니까?”
다시 받아 적었다.
“언제까지 필요하세요?”
— 오늘 되면 제일 좋고요.
준석이 시계를 봤다.
“확인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회사로 걸었다.
자재과를 부탁했다.
잠시 뒤 태규 목소리가 들렸다.
— 네.
“태규야.”
— 네.
“하나만 봐봐.”
준석이 품목과 규격을 불렀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 한 군데 있을 겁니다.
“오늘 되고?”
잠깐 말이 없었다.
— 그건 안 물어봤는데요.
“물어봐.”
— 네.
태규가 끊으려다 말했다.
— 대리님.
“왜.”
— 여기로 자꾸 전화하시면 또 걸립니다.
준석은 전화부스 밖을 봤다.
남자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알아. 이것만.”
— 점심때 제가 확인해놓겠습니다.
“그래.”
준석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 *
점심이 조금 지난 뒤.
준석은 다시 공중전화 앞에 섰다.
태규에게 확인한 내용을 듣고 조금 전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김준석입니다.”
— 네, 김 대리님.
“오늘 된답니다.”
상대가 잠깐 말이 없었다.
— 아…… 저희 구했어요.
준석의 펜이 멈췄다.
“구하셨어요?”
— 급해서 다른 데도 알아봤거든요.
“아.”
—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네.”
준석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전화부스로 들어갔다.
* * *
호출기는 조용한 날이 더 많았다.
늦게 전화하면 이미 구했다는 곳도 있었다.
반대로 태규가 수첩을 펼치기도 전에 가게 이름부터 말하는 물건도 생겼다.
준석이 호출을 받으면 태규가 확인했다.
태규가 확인하면 다시 준석이 전화를 했다.
며칠 지나자 태규가 말했다.
“이게 더 복잡한 것 같은데요.”
“뭐가.”
“전화요.”
준석이 태규를 봤다.
“그럼 너도 하나 사.”
“싫습니다.”
“왜.”
“돈 아깝습니다.”
준석이 피식 웃었다.
태규는 수첩을 덮었다.
* * *
준석이 영업을 마치고 물건을 받아오는 날이 생겼다.
태규도 퇴근길에 한주에 들렀다.
어떤 곳은 물건을 받자마자 돈을 줬고,
어떤 곳은 몇 천 원을 더 얹어줬다.
준석이 먼저 낸 돈도 있었다.
태규 지갑에서 나간 돈도 있었다.
그러던 날이었다.
준석이 가져온 물건을 확인한 거래처 담당자가 전표를 바카라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월말에 같이 드릴게요.”
준석이 물었다.
“월말이요?”
“네. 이번 달 결제할 때.”
준석은 잠깐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표를 가방에 넣었다.
* * *
이틀 뒤.
태규가 준석을 불렀다.
“대리님.”
“왜.”
“그쪽 돈 받으셨어요?”
준석이 태규를 봤다.
“어디?”
“저번에 제가 사온 거요.”
“아.”
준석이 잠깐 생각했다.
“월말에 준대.”
태규의 손이 멈췄다.
“월말이요?”
“어.”
“그럼 제가 낸 건요?”
준석이 태규를 봤다.
“얼만데?”
태규가 금액을 말했다.
“내가 먼저 줄까?”
“아뇨.”
태규가 수첩을 덮었다.
“다음부터는 얘기 좀 해주세요.”
“뭘.”
“돈 늦게 받는 거요.”
준석은 잠깐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태규는 다시 수첩을 펼쳤다.
준석도 더 말하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둘은 회사 근처 분식집 구석에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음식보다 영수증과 메모지가 먼저 올라왔다.
준석 수첩.
태규 수첩.
접힌 거래명세표.
지폐 몇 장.
준석이 영수증 하나를 들었다.
“이거 네가 냈냐?”
태규가 받아봤다.
“아닌데요.”
“그럼 나야?”
“대리님이 모르시면 제가 압니까?”
준석이 날짜를 봤다.
“이날 내가 한주 갔었나?”
“제가 갔던 것 같은데.”
“그럼 네 거잖아.”
태규가 영수증을 다시 봤다.
“아닌데.”
“확실해?”
“이건 제가 안 샀습니다.”
준석이 영수증을 내려놓았다.
다른 한 장을 집었다.
“이건?”
태규가 보자마자 말했다.
“그건 제가 냈고요.”
“받았어?”
태규가 입을 열다가 멈췄다.
수첩을 펼쳤다.
한 장을 넘겼다.
다시 앞으로 갔다.
“받은 것 같은데…….”
준석이 태규를 봤다.
“같은데?”
“기억이 안 납니다.”
준석이 웃었다.
“너도 똑같네.”
태규가 계산기를 끌어당겼다.
“잠깐 있어보세요.”
영수증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숫자를 눌렀다.
지웠다.
다시 눌렀다.
준석이 물었다.
“안 맞아?”
“네.”
“얼마나?”
태규가 영수증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걸 모르겠습니다.”
“왜.”
“이걸 누가 냈는지 모르잖아요.”
준석이 영수증을 받아 들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종업원이 다가왔다.
“주문 안 하세요?”
준석이 고개를 들었다.
“아, 라면 두 개요.”
태규가 말했다.
“김밥도 하나 주세요.”
종업원이 돌아갔다.
준석은 영수증을 내려놓았다.
“이거 계속 이러겠는데.”
태규가 수첩의 빈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니까 적어놓죠.”
날짜를 적었다.
그 옆에 품목과 금액을 썼다.
9/○ 베어링 ○○원
준석이 영수증 하나를 짚었다.
“그건 내가 냈어.”
태규가 옆에 적었다.
준
펜이 멈췄다.
준석이 물었다.
“왜.”
태규가 방금 쓴 글자를 봤다.
“대리님도 준이잖아요.”
준석도 들여다봤다.
“그러네.”
태규가 줄을 긋고 다시 적었다.
김
다음 줄에는
서
준석이 웃었다.
“그게 낫네.”
태규가 다음 영수증을 집었다.
한 줄을 더 적었다.
준석이 물었다.
“받은 건?”
태규의 펜이 멈췄다.
그제야 오른쪽에 금액 하나를 적었다.
다음 줄.
또 다음 줄.
그러다 한 곳에서 손이 멈췄다.
준석이 물었다.
“왜.”
태규가 빈칸을 내려다봤다.
“여긴 아직 안 받았잖아요.”
준석도 그 칸을 봤다.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라면이 나왔다.
둘은 수첩과 영수증을 한쪽으로 밀었다.
준석이 젓가락을 들었다.
“먹고 하자.”
태규도 젓가락을 들었다.
빈칸은 그대로 남았다.
* * *
다음 날 오후.
준석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자재과로 들어왔다.
태규는 전날 적어놓은 수첩을 보고 있었다.
준석이 종이를 그 위에 놓았다.
“이거 좀 봐.”
태규가 펼쳤다.
첫 줄을 읽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종이를 아래로 내렸다.
아직 더 있었다.
태규가 고개를 들었다.
“이걸 다요?”
“어.”
태규가 다시 목록을 봤다.
“언제까지요?”
준석이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금요일.”
태규도 달력을 봤다.
사흘 남았다.
다시 종이를 내려다봤다.
잠깐 생각하더니 계산기를 끌어당겼다.
준석이 물었다.
“왜?”
태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첫 번째 금액을 눌렀다.
두 번째.
세 번째.
손이 멈췄다.
숫자를 지웠다.
처음부터 다시 눌렀다.
딸깍.
딸깍.
딸깍.
준석은 옆에 서서 기다렸다.
태규의 손이 멈췄다.
계산기 숫자를 한동안 바라봤다.
준석이 물었다.
“얼마인데?”
태규가 고개를 들었다.
준석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