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석은 계산기를 다시 눌렀다.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 단가는 어렵습니다.”
맞은편 구매담당자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김 대리가 결정하라는 얘기 아니에요.”
“그래도 이 정도면 제가 들어가서 얘기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우리도 위에서 내려온 거예요.”
준석은 견적서를 내려다봤다.
지난달보다 물량은 줄었는데 단가는 더 내려가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 말씀하시는 겁니까?”
담당자가 볼펜으로 숫자를 적었다.
준석이 봤다.
“이건 제가 답을 못 드립니다.”
“그러니까 들어가서 얘기해봐요.”
“알겠습니다.”
준석은 견적서를 가방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담당자가 불렀다.
“김 대리.”
“네.”
“지난번 같은 것도 구해줄 수 있어요?”
준석이 돌아봤다.
며칠 전 자기 회사 제품도 아닌 물건을 납품할 때 같이 가져다달라고 했던 곳이었다.
결국 회사에서는 거절했다.
“이번에는 뭡니까?”
“벨트.”
“벨트요?”
담당자가 손으로 폭을 그려 보였다.
“기계에 들어가는 거. 하나가 나갔어.”
“저희 취급품목 아닌 거 아시죠?”
“알아요.”
준석이 잠깐 서 있었다.
“그런데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
담당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서류를 넘겼다.
“김 대리는 오잖아.”
준석이 잠깐 웃었다.
“규격은 아십니까?”
“그런 거 몰라.”
“그러면 찾기 어려울 텐데요.”
“쓰던 건 있어.”
“그건 버리지 마세요.”
담당자가 고개를 들었다.
“왜?”
“다음에 올 때 한번 보겠습니다.”
“다음 주에?”
“네.”
“그전에 구하면?”
“그럼 됐고요.”
담당자가 웃었다.
“알았어요.”
준석은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는데 바카라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 왔을 때는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전화기와 서류함은 남아 있는데 의자는 다른 쪽으로 밀려 있었다.
준석은 걸음을 늦췄다.
뒤에서 구매담당자가 나왔다.
“왜요?”
“저 자리 비었네요.”
“나갔어요.”
“언제요?”
“지난주.”
“그럼 저쪽 일은 누가 합니까?”
담당자가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웃으면서 말했다.
준석도 웃었다.
“바쁘시겠네요.”
“죽겠어요.”
담당자가 물었다.
“김 대리네는 괜찮아요?”
준석이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뭐, 비슷합니다.”
“다 똑같네.”
담당자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준석은 계단을 내려갔다.
회사로 돌아오자 과장이 불렀다.
“어떻게 됐어?”
준석이 견적서를 내밀었다.
과장이 숫자를 확인했다.
“이걸 맞추라고?”
“구매 쪽에서는 그렇답니다.”
“물량도 줄인다며.”
“네.”
과장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물량 줄이고 단가 깎고.”
계산기를 끌어당겨 몇 번 눌렀다.
준석은 기다렸다.
“이건 내가 결정 못 해.”
견적서를 다시 밀었다.
“부장님 오시면 같이 들어가.”
“네.”
준석이 종이를 챙겼다.
“다른 데도 좀 더 뛰어보고.”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왔다.
최 사원이 물었다.
“또 깎아달래?”
“응.”
“얼마?”
준석이 숫자를 말했다.
최 사원이 헛웃음을 쳤다.
“그냥 공짜로 달라고 하지.”
준석은 대꾸하지 않고 수첩을 꺼냈다.
오늘 방문한 업체 옆에 새 물량을 적었다.
지난달 숫자에는 줄을 그었다.
수첩을 덮으려다 한쪽 귀퉁이에 작게 썼다.
벨트.
오후가 조금 지나 보전반 직원이 자재과로 들어왔다.
“태규 씨.”
서태규가 고개를 들었다.
“네.”
“지난번 그 집 전화번호 있지?”
“어디요?”
“오링 샀던 데.”
“한주요?”
“응.”
태규가 서랍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몇 장을 넘겼다.
“적으세요.”
직원이 주머니를 뒤졌다.
볼펜만 나왔다.
“종이 하나 줘.”
태규가 메모지를 뜯어 번호를 적어줬다.
직원은 받아 들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들어왔다.
“태규 씨.”
“네.”
“뭐라고 해야 알아?”
“규격 말씀하시면 됩니다.”
직원이 메모지를 내밀었다.
“이거?”
태규가 봤다.
“잠깐만요.”
발주서철에서 지난번 기록을 찾아 확인했다.
전화를 당겨 번호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오링 사간 회사인데요.”
상대의 말을 들으며 규격을 읽었다.
“네, 그겁니다. 다섯 개 더 있습니까?”
잠시 기다렸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있답니다.”
직원이 말했다.
“그럼 주문해.”
“직접 가져와야 됩니다.”
직원이 태규를 봤다.
“또?”
태규가 웃었다.
“거기 배달 안 합니다.”
직원이 한숨을 쉬었다.
“내일까지는 있어야 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박 대리가 물었다.
“오늘 꼭 필요한 거야?”
“오늘까지는 아닙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얘기해.”
“네.”
보전반 직원이 나갔다.
태규는 수첩을 펼쳤다.
점포 이름 옆에 적힌 글씨가 보였다.
재고 있음.
배달 안 함.
그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전화 확인 가능.
수첩을 덮었다.
며칠 뒤.
준석은 다시 같은 업체를 찾았다.
사무실은 전보다 어수선했다.
바카라상 위에 서류가 쌓여 있었고 구매담당자는 전화기를 어깨에 끼운 채 뭔가를 적고 있었다.
“아니, 금요일은 안 된다니까요. 목요일까지 받아야 돼요.”
준석은 맞은편에 앉아 기다렸다.
“그럼 다른 데 알아봐야죠.”
전화가 끊겼다.
담당자가 준석을 봤다.
“미안해요.”
“많이 바쁘시네요.”
“한 명 빠지니까 정신이 없어.”
준석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지난번 단가는 안에서 다시 보고 있습니다.”
“얼마까지 돼요?”
“아직 결정 안 났습니다.”
“빨리 좀 해줘요.”
“네.”
납기와 다음 달 예상물량을 확인했다.
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까지 갔다가 생각이 났다.
“참.”
담당자가 고개를 들었다.
“벨트는 구하셨어요?”
“아.”
담당자가 바카라상 밑을 가리켰다.
신문지로 둘둘 감긴 물건이 있었다.
“아직.”
“왜요?”
“갈 사람이 있어야지.”
담당자가 신문지 뭉치를 발끝으로 밀었다.
“김 대리가 가져갈래?”
준석이 웃었다.
“제가요?”
“지난번에 본다며.”
준석은 신문지 뭉치를 내려다봤다.
“언제까지 필요하신데요?”
“내일.”
“내일이요?”
“안 되면 됐고.”
준석은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다 몸을 숙여 신문지 뭉치를 집었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이거 가져가도 됩니까?”
“가져가요.”
“구한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알아요.”
준석은 신문지 뭉치를 가방에 넣으려다 그만뒀다.
기름이 배어 있었다.
손에 들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회사로 돌아오는 버스 안.
준석은 신문지 뭉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기름이 종이에 조금씩 번졌다.
옆에 앉은 남자가 한번 쳐다봤다.
준석은 신문지를 한 겹 더 접었다.
창밖으로 상가와 공장들이 지나갔다.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준석은 무릎 위의 물건을 한번 내려다봤다.
다시 창밖을 봤다.
“태규야.”
퇴근 준비를 하던 태규가 돌아봤다.
준석이 자재과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신문지 뭉치가 들려 있었다.
“이거 한번 봐줄래?”
태규가 신문지를 풀었다.
검은 벨트가 나왔다.
손으로 돌려보고 옆면을 살폈다.
글자는 거의 닳아 있었다.
“이것만 가져오신 겁니까?”
“응.”
“규격은요?”
“모른대.”
“어디 들어가는 건데요?”
준석이 잠깐 멈췄다.
“그것도 안 물어봤네.”
태규가 준석을 봤다.
“왜.”
“이걸 어떻게 찾습니까.”
“못 찾아?”
“모르죠.”
태규가 벨트를 뒤집었다.
옆면에 희미하게 남은 글자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한주에 가져가면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전화로는 안 돼?”
태규가 벨트를 들어 보였다.
“뭘 보고 설명하시게요?”
준석이 웃었다.
“그렇네.”
“언제까지랍니다?”
“내일.”
태규도 웃었다.
“급하네요.”
“그러게.”
태규가 벨트를 내려놓았다.
“구해주신다고 하셨어요?”
“아니.”
“잘하셨네요.”
“왜?”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준석이 신문지를 다시 폈다.
벨트를 올려놓고 감쌌다.
“한주 몇 시부터 열어?”
태규가 준석을 봤다.
“가시게요?”
“아침에 잠깐 갔다 오면 안 되나?”
“회사에는요?”
준석의 손이 멈췄다.
태규가 웃었다.
“외근 잡혀 있으십니까?”
“오후에.”
“그럼 안 되겠네요.”
준석이 신문지를 한 번 더 접었다.
“퇴근하고 가면?”
“문 닫는 데도 있을 겁니다.”
“토요일은?”
“여는 데도 있고 안 여는 데도 있고요.”
준석이 벨트를 들었다.
“복잡하네.”
태규가 가방을 다시 내려놓았다.
“어디부터 가실 건데요?”
“그걸 물어보려고 왔지.”
태규가 서랍을 열었다.
작은 수첩을 꺼냈다.
몇 장을 넘겼다.
“벨트 하는 데가…”
손가락이 한 곳에서 멈췄다.
“여기부터 가보세요.”
준석이 옆으로 다가왔다.
“여기?”
“네. 없으면 이쪽.”
태규가 다른 번호를 짚었다.
준석은 자기 수첩을 꺼내 상호와 번호를 옮겨 적었다.
그러다 태규의 수첩을 다시 봤다.
점포 이름 옆에 짧은 글씨들이 붙어 있었다.
재고 있음.
배달 안 함.
전화 확인 가능.
준석이 물었다.
“이걸 다 적어놨어?”
“다음에 또 갈까 봐요.”
준석이 태규를 봤다가 다시 수첩을 봤다.
“간다.”
“네.”
준석이 신문지 뭉치를 들고 나갔다.
태규는 잠시 문 쪽을 보다가 자기 수첩을 받아 들었다.
서랍을 열었다.
수첩을 넣고 닫았다.